한 분이 서가 앞에서 오래 서 계신 걸 봤어요. 두 권을 번갈아 들었다 놓기를 몇 번 하시더니 결국 빈손으로 가셨습니다. 니체 칸이었어요.
이름은 익숙한데 첫 장이 안 넘어가는 저자가 있죠. 니체가 딱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독자의 머리 문제가 아니라 순서 문제일 때가 많더군요.
니체의 글은 논문처럼 앞에서 뒤로 쌓이지 않아요. 짧은 단락이 툭툭 놓여 있고, 앞뒤가 서로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따라가려는 독자일수록 더 자주 막히죠.
이 사람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보다, 아무 데나 펼쳐서 걸리는 단락 하나를 붙잡는 쪽이 잘 맞더군요. 형태가 원래 그렇게 생겼거든요.
많은 분이 가장 유명한 책을 첫 책으로 고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성경 문체를 흉내 낸 이야기 형식이라, 배경 없이 들어가면 무슨 말인지 안 잡혀요. 저는 첫 책으로는 짧은 잠언들이 번호로 나열된 책을 권합니다. 한 번에 하나씩만 읽으면 되니까요.
나를 읽지 말고, 나를 통해 너를 읽어라.
이 태도가 이 저자를 읽는 열쇠라고 생각해요. 저자의 체계를 외우려 들면 지치고, 문장을 거울로 쓰면 끝까지 갑니다.
한 단락을 읽고 덮어도 됩니다. 오히려 그게 이 사람을 읽는 정상 속도예요. 대신 그 단락을 하루 동안 들고 다녀 보세요. 출근길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떠올리면 세 번째쯤에 뜻이 열리는 경우가 많더군요.
번역본은 두 종류를 나란히 놓고 같은 단락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번역이 갈리는 자리가 대개 그 문장의 핵심이거든요.
니체를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권위 있는 목록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됩니다. 짧은 잠언집을 한 권 잡고, 오늘 걸리는 단락 하나만 들고 나가보세요.
이 저자는 완독을 요구하지 않더군요. 어느 문장이 나를 흔드는지 내가 고르는 순간, 읽는 순서는 내가 만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