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첫 칸에 제목만 쓰고 사십 분을 앉아 계시던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종이는 그대로였죠.
책은 다 읽으셨더군요. 그런데도 안 써졌습니다. 이건 읽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작하는 자리의 문제입니다.
독후감이 안 써지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시작이 거의 같습니다. 줄거리부터 쓰려고 합니다.
그런데 줄거리는 쓰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어디까지 써야 할지 모르겠고, 다 쓰고 나면 분량은 찼는데 내 얘기는 한 줄도 없죠.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미 아는 내용이라 안 읽힙니다.
줄거리는 독후감의 재료지 내용이 아닙니다. 여기서 갈립니다.
제가 권하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하나, 마음이 움직인 자리를 하나 고릅니다. 좋았든 싫었든 상관없습니다. 읽다가 멈췄던 대목, 화가 났던 문장, 아는 사람이 떠오른 장면. 한 군데면 됩니다.
둘, 그 대목을 짧게 옮겨 적습니다. 인용 두세 줄이면 충분하죠.
셋, 왜 거기서 멈췄는지 씁니다. 여기가 독후감의 본문입니다. 내 얘기가 나오는 자리고요.
넷, 줄거리는 그 대목을 이해시킬 만큼만 씁니다. 앞이 아니라 중간에, 필요한 만큼만.
이 순서로 하면 첫 줄이 훨씬 쉽게 나옵니다. 첫 줄이 요약이 아니라 내가 겪은 것이 되니까요.
잘 써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첫 문장을 거창하게 만들려다 못 쓰시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냥 이렇게 시작하셔도 됩니다. 이 책에서 한 대목이 오래 남았다고요. 그리고 그 대목을 적으시면 됩니다. 좋은 첫 문장은 뒤에 붙일 게 있는 문장이지 멋있는 문장이 아닙니다.
이것도 자주 못하십니다. 재미없었던 책으로는 독후감을 못 쓴다고 생각하시죠.
저는 오히려 그쪽이 쓰기 쉽다고 봅니다. 어디서 안 맞았는지가 분명하니까요. 왜 안 맞았는지를 쓰는 것도 훌륭한 독후감입니다. 억지로 좋았다고 쓴 글은 읽는 사람이 먼저 압니다.
정직하게 쓴 실망은 꾸며낸 감탄보다 언제나 읽을 만하다.
한 대목만으로 분량이 안 나오면 방법이 있습니다.
대목을 하나 더 고르십시오. 두 대목을 나란히 놓으면 그 사이에서 할 말이 생깁니다. 이 장면과 저 장면이 왜 다르게 다가왔는지 같은 것 말이죠.
혹은 읽기 전과 읽은 뒤를 비교하십시오. 이 책을 펴기 전에 이 주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 둘 사이가 곧 그 책이 한 일입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좋았던 대목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장면을 말하더군요.
그럼 그것부터 쓰라고 했습니다. 십 분쯤 뒤에 종이가 절반쯤 차 있었습니다.
막힌 자리는 실력이 아니라 순서였던 겁니다. 줄거리부터 쓰라는 규칙은 어디에도 없는데 우리가 그렇게 배웠을 뿐이죠. 그 순서 하나만 바꾸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