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들어오셔서 아무 책도 안 펴고 앉아 계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한참 뒤에 나가시더군요. 나중에 여쭤보니 그날 약속을 미룰까 말까 한 시간을 고민하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나가셨고 좋았다고 하셨죠.
약속을 잡을 때와 나가야 할 때의 나는 다른 사람입니다.
잡을 때의 나는 그날의 나에게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날의 나는 하루를 다 쓰고 지쳐 있죠. 같은 사람이 정하고 같은 사람이 치르지만, 정할 때와 치를 때의 형편이 다릅니다.
그러니 당일에 미루고 싶어지는 건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형편이 달라진 겁니다. 이 둘을 섞으면 자기가 변덕스러운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죠.
여기가 중요합니다. 나가기 싫은 마음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앞쪽이면 나가시면 대개 괜찮아집니다. 문 앞까지가 제일 무겁고 앉으면 풀리죠. 뒤쪽이면 나가서도 안 풀립니다. 오히려 더 무거워져서 돌아오게 됩니다.
갈라내는 방법은 지난번을 떠올리는 겁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가벼웠는지 무거웠는지요. 그 기억이 지금 마음보다 정확합니다.
앞쪽이라면 저는 나가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미루면 그날은 편해지지만 두 가지가 남죠.
하나는 미안함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번엔 더 나가기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한 번 미루면 그 관계에 대한 기본값이 바뀝니다. 그다음부터는 안 나가는 쪽이 자연스러워지죠.
그래서 저는 취소보다 줄이는 쪽을 권합니다. 두 시간을 한 시간으로, 저녁을 차 한 잔으로요. 통째로 없애는 것과 짧게 하는 것은 남는 게 완전히 다릅니다.
뒤쪽이면 이건 체력 얘기가 아닙니다. 나가기 싫은 게 신호인 거죠.
그 신호를 계속 무시하고 나가면 어느 날 관계 자체가 무너집니다. 참다가 한 번에 끊는 것보다, 횟수를 줄여서 오래 가져가는 편이 낫더군요. 만나는 간격을 늘리는 건 관계를 버리는 게 아닙니다.
견디며 지킨 관계는 지켜진 것이 아니라 미뤄진 것이다.
정말 못 나가시는 날도 있죠. 그럴 때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핑계를 지어내지 마십시오. 지어낸 이유는 기억해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관계는 피곤해집니다. 오늘 기운이 안 나서 그런다고 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짜를 그 자리에서 잡으십시오. 그 한 줄이 있으면 취소가 거절로 안 읽힙니다.
한 시간을 앉아 계셨던 그분께 저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약속도 당일에는 무겁습니다. 그건 그 사람을 덜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가는 일에 값이 들기 때문이죠. 값이 든다는 걸 인정하면 그 값을 치를지 말지를 그때그때 정할 수 있습니다.
그날 그분은 나가셨고 좋으셨답니다. 다음에는 한 시간을 안 고민하셔도 될 겁니다. 무거운 건 문 앞까지라는 걸 한 번 겪으셨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