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책을 한 권 뽑아 손바닥에 얹어 무게를 재보시더군요. 그러고는 도로 꽂으셨습니다.
내용을 보신 게 아니었습니다. 무게만 재보고 결정하신 겁니다. 그 손짓을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봅니다.
먼저 이것부터 갈라야 합니다. 두꺼운 책이 어려운 책은 아니죠.
쉬운 문장으로 팔백 쪽을 쓴 책도 있고, 백오십 쪽인데 한 문단에 삼십 분이 드는 책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가 앞에서 두께를 난이도로 읽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그것뿐이니까요.
그래서 두꺼운 책은 어렵기 전에 이미 밀려납니다. 펴보지도 않고 결정이 나는 겁니다.
그러면 왜 두께가 그렇게 부담일까요. 저는 이렇게 봅니다.
얇은 책은 시작할 때 끝이 보입니다. 오늘 앉으면 오늘 끝난다는 계산이 서죠. 두꺼운 책은 그 계산이 안 섭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을 시작하는 게 어려운 겁니다.
읽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작의 문제인 거죠. 그래서 두꺼운 책은 읽다가 그만두는 게 아니라 아예 안 시작합니다.
방법은 단순합니다. 책이 아니라 장을 단위로 삼으십시오.
두꺼운 책은 거의 다 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목차를 보고 한 장이 몇 쪽인지 세어보시면 대개 이삼십 쪽이죠. 그 정도면 얇은 책 한 권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책인데 세는 단위만 바꾼 겁니다. 그런데 손이 나가는 정도가 완전히 달라지더군요.
작은 요령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갈피를 앞에서 세지 말고 남은 쪽을 세십시오.
지금 몇 쪽까지 읽었나가 아니라 몇 쪽 남았나로 보는 겁니다. 앞에서 세면 두꺼운 책은 아무리 읽어도 진도가 안 나간 것처럼 느껴지죠. 뒤에서 세면 줄어드는 게 눈에 보입니다.
그럼 굳이 두꺼운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물으실 수 있겠죠. 저는 몇 권은 그럴 값어치가 있다고 봅니다.
얇은 책은 결론을 줍니다. 두꺼운 책은 저자가 그 결론에 이른 과정에 나를 데리고 갑니다. 요약본이 대신 못 하는 게 그 과정이죠. 오래 걸어본 길만 자기 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름길로 도착한 자는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길을 아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두꺼운 책을 절반만 읽고 덮어도 그건 실패가 아닙니다.
팔백 쪽 중 삼백 쪽을 읽었다면 얇은 책 두 권을 읽은 셈이죠. 다 못 읽었다는 이유로 그 삼백 쪽을 없던 것으로 치는 건 너무 아깝습니다.
무게를 재보고 도로 꽂으셨던 그분께 저는 목차만 한번 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에 그 책을 빌려 가시더군요. 두께는 한 번에 넘는 게 아니라 나눠서 넘는 것입니다. 그 하나만 바꾸면 서가에서 밀어냈던 책들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