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아무렇지 않게 넘긴 말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죠.
그런데 폐관하고 서가를 정리하는데 그게 올라왔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서요. 저는 그 시차가 어디서 오는지 한동안 궁금했습니다.
말이 들어온 순간 우리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죠.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뭐라고 답할지 정하고, 표정을 관리하고, 다음 할 일을 생각하죠. 감정을 확인하는 건 그 목록에서 제일 뒤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라 확인할 차례가 안 온 것입니다. 할 일이 끝나고 혼자가 되면 그때 순서가 돌아오죠.
앞서 말이 늦게 떠오르는 성격을 적은 적이 있는데, 두 가지가 같이 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정리에 시간이 걸리는 사람은 감정도 늦게 옵니다. 반대로 그 자리에서 바로 화를 내는 사람은 말도 바로 나오고요. 처리 속도의 문제지 감정의 크기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늦게 아는 사람이 덜 화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오래 갑니다.
문제는 여기죠. 그 자리는 이미 지났습니다.
상대는 아무 일 없었다고 알고 있고, 지금 꺼내면 뜬금없어 보일 것 같죠. 그래서 대개 안 꺼냅니다. 그러면 그 감정은 갈 데가 없어 안에서 돕니다.
앞서 웃어넘기는 버릇을 적으면서도 같은 얘기를 했는데, 처리 안 된 감정은 없어지지 않고 미뤄집니다.
그 자리에서 못 했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하루 이틀 뒤에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번에 하신 말이 좀 걸렸다고 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빠져 있어서 상대가 방어를 덜 하죠.
그리고 다음번을 위해 적어두십시오. 어떤 말에 언제 화가 났는지가 쌓이면 패턴이 보입니다. 그러면 다음에 같은 말이 들어올 때 그 자리에서 알아차리게 되죠. 시차가 조금씩 줄어듭니다.
늦게 온 감정은 약한 감정이 아니라, 늦게까지 처리되지 못한 감정이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왜 그때 아무 말도 못 했나 하고 스스로를 나무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몰랐던 겁니다. 모르는 걸 말할 수는 없죠.
저도 그 저녁에 서가 사이에서 한참 서 있었습니다. 다음 날 그 사람에게 짧게 말했고, 그걸로 정리가 됐습니다. 늦었지만 늦어서 안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