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어떤 손님이 하신 말에 저는 아무 대답도 못 했습니다. 그냥 웃고 넘겼죠.
그날 폐관하고 서가를 정리하는데 문장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때 이렇게 말했으면 됐을 텐데 하고요. 서너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말주변이 없다는 말을 우리는 능력 부족으로 씁니다. 저는 그게 정확하지 않다고 봅니다.
늦게 떠오르는 사람은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리에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말을 받고, 뜻을 따지고, 내 생각과 맞춰본 다음에 문장이 나오죠. 그 과정을 안 거치고 바로 나오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늦게 오는 건 결함이 아니라 순서의 차이더군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대화에는 시간 제한이 걸려 있죠.
몇 초 안에 뭔가를 내놓아야 하는데, 그 몇 초 동안 우리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가 동시에 돌아갑니다. 무슨 말을 할지와,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입니다. 뒤쪽이 무거운 사람은 앞쪽을 끝낼 시간이 모자랍니다.
어느 쪽이 나은 게 아니라 어디에 시간을 쓰느냐가 다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습니다. 나중에 떠오른 문장은 대개 그 자리에서 나왔을 말보다 정확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못 쓴 것으로 칩니다. 시간이 지났으니까요. 말은 제때 해야 값이 있다는 규칙을 어디선가 배운 겁니다.
저는 그 규칙이 늘 맞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말은 그 자리에서 흩어지지만, 며칠 뒤에 건네는 말은 상대가 기억하더군요. 늦게 왔다는 것 자체가 무게가 되니까요.
즉시 나온 대답은 반사이고, 시간을 견딘 대답은 선택이다.
그래서 저는 요즘 늦게 떠오른 말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며칠 지나서라도 그 사람에게 건넵니다. 저번에 하신 말씀에 제가 답을 못 했는데, 하고 시작하면 됩니다. 이상하게 볼까 봐 망설이시겠지만 제 경험으로는 반대였습니다. 그 며칠을 생각했다는 게 전해지니까요.
물론 늘 나중에 할 수는 없죠. 그래서 하나만 준비해두시면 편합니다.
시간을 버는 한마디입니다. 잠깐 생각해볼게요, 그건 미처 생각 못 했네요, 저는 좀 달리 봐요. 이런 짧은 문장이면 됩니다. 내용이 아니라 자리를 지키는 말이죠.
이걸 하나 갖고 있으면 침묵이 무능으로 안 읽힙니다. 정리할 시간을 정당하게 벌 수 있고요.
그날 밤 서가에서 떠오른 문장을 저는 다음 주에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그 얘기를 계속 생각하고 계셨느냐고요.
그게 이 성격이 가진 것 같습니다. 빨리는 못 하지만 오래 들고 있는 것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이기는 대화는 못 해도, 며칠 뒤까지 남는 말은 이쪽에서 나오더군요.
오늘 못 한 말이 밤에 떠오르셨다면, 그건 늦은 게 아니라 이제 완성된 겁니다. 그리고 완성된 말은 아직 쓸 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