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 책을 몰아서 빌려 가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두 달쯤 뒤에는 완전히 다른 서가에 서 계시더군요.
그분이 저한테 그러셨습니다. 자기는 뭘 해도 오래 못 간다고요. 좀 부끄러워하시는 얼굴이었습니다.
새로 시작한 일이 언제 시들해지는지 보면 시점이 비슷하죠.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뭘 해도 늡니다. 그 구간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다 기초가 끝나고 지루한 반복이 시작되는 자리가 옵니다. 거기서 대부분 놓죠.
그러니 쉽게 질린다는 건 성격 문제라기보다 그 지점을 여러 번 만난 사람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일 자체가 좋았던 게 아니라 시작한다는 느낌이 좋았던 것이죠. 새 도구를 사고,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의 나를 상상하는 그 며칠이요. 그게 끝나면 남는 건 반복뿐인데 반복은 원래 재미가 없습니다.
이걸 알아차리면 다음번에는 좀 다르게 시작하게 됩니다. 도구를 먼저 사지 않고 며칠 해보는 식으로요.
여기서 한쪽만 말씀드리면 공정하지 않겠죠.
여러 가지를 짧게 해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못 보는 연결이 생깁니다. 한 분야만 오래 판 사람은 그 안이 깊고, 여러 데를 다녀본 사람은 그 사이를 알아보죠. 둘 다 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달을 했으면 두 달치는 남습니다. 그만뒀다고 그 시간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완주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는 계산이 오히려 이상한 겁니다.
그만둔 일을 돌아보실 때 저는 이걸 권합니다. 못 한 것 말고 남은 것을 세어보십시오.
무엇을 알게 됐는지, 어떤 낱말이 익숙해졌는지, 그 분야 사람들이 무엇을 두고 다투는지. 이런 건 그만둬도 안 없어집니다. 다음에 그 얘기가 나오면 알아듣게 되죠.
끝까지 가지 않은 길에도 발자국은 남는다. 그 발자국은 다음 길에서 쓰인다.
그렇다고 계속 옮겨 다니시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깊이는 반복에서만 나옵니다. 지루한 구간을 지나본 경험이 하나쯤 있으면, 다음번에 그 구간이 왔을 때 이게 원래 그런 자리라는 걸 압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좀 더 버티죠.
그래서 저는 하나만 정해두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나머지는 마음껏 옮겨 다니시되, 하나는 재미없어도 계속하시는 겁니다. 그 하나가 나머지를 옮겨 다닐 수 있게 해주는 바닥이 됩니다.
다른 서가에 서 계셨던 그분께는 그전 분야에서 뭐가 남았는지 여쭤봤습니다. 한참 얘기하시더군요. 그러시고는 좀 웃으셨습니다.
식었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남은 것부터 세어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