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를 다 들으셨다면서 그 강사가 쓴 책을 빌리러 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펴서 목차만 보시더니 도로 놓고 가셨습니다. 강의에서 다 들은 내용이라고 하시더군요. 이런 자리를 요즘 자주 봅니다.
무언가를 배우려 하실 때 어디부터 찾으시느냐고 여쭤보면 대답이 비슷합니다.
영상이나 강의부터 찾으신다고 하시죠. 이유도 대체로 같습니다. 어디부터 봐야 할지 정해주니까 편하다는 겁니다. 책은 어느 책을 골라야 하는지부터 정해야 하는데 강의는 그게 이미 정해져 있죠.
그리고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크다고 하시더군요. 다섯 시간짜리라고 하면 끝이 보이니까요.
이 흐름을 한 줄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정리된 지식이 정리 안 된 지식보다 먼저 나갑니다.
책은 저자가 자기 순서대로 쓴 것이라 독자가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강의는 가르치는 사람이 이미 순서를 잡아둔 것이고요. 배우는 쪽에서 드는 힘이 확실히 적죠.
바쁜 사람에게 이건 분명한 장점입니다. 저는 그걸 부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한쪽만 말씀드리면 공정하지 않겠죠.
정리된 것만 계속 받으면 정리하는 일 자체를 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뭔가를 할 때 필요한 건 정리된 결론이 아니라 어지러운 상태에서 순서를 잡는 힘이더군요. 그건 어지러운 걸 다뤄봐야 붙습니다.
그리고 강의는 그 사람의 순서입니다. 다 듣고 나면 그 사람의 지도를 갖게 되는데, 그 지도 밖은 없는 것처럼 여겨지죠. 책 여러 권을 읽은 사람은 지도가 여러 개라 그 사이를 알아봅니다.
반납대에서 이런 말씀도 자주 듣습니다. 강의는 열심히 들었는데 막상 하려니 안 되더라고요.
들을 때는 이해가 되는데 그건 따라간 것이지 해본 게 아니거든요. 이건 강의 탓이라기보다 듣기라는 방식의 성질입니다. 책도 눈으로만 지나가면 똑같고요.
저는 둘을 붙여 쓰시라고 말씀드립니다.
강의로 들어가시고 책으로 나오십시오. 처음에 전체 그림을 강의로 잡으시면 훨씬 빠릅니다. 그다음에 그 분야 책을 두어 권 보시면, 강의에서 안 다룬 대목과 다르게 말하는 대목이 드러나죠. 그 어긋나는 자리가 실제로 배우는 자리입니다.
하나의 지도만 가진 사람은 그 지도가 틀렸을 때 길을 잃는다.
그분은 다음 달에 다시 오셨습니다. 그 책을 빌려 가시더군요.
강의에서 배운 걸로 뭘 해보시다가 안 되는 대목이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책이 필요해지신 거죠.
강의로 들어가서 책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순서만 그렇게 두시면 둘 다 값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