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객잔 장면에서 이런 등장이 있어. 비 오는 밤, 문이 열리고 대나무 삿갓을 깊게 눌러쓴 사람이 들어와. 얼굴은 안 보이고 턱만 보여.
객잔이 조용해져. 다들 쳐다봐. 그 사람은 구석 자리에 앉아서 술 한 병을 시켜. 삿갓은 안 벗어.
이 삿갓이 죽립이야. 대나무로 엮은 삿갓이지.
죽립은 원래 햇볕이랑 비를 가리는 물건이야. 먼 길 가는 사람이 쓰는 거지. 행낭 얘기를 전에 적었는데, 강호 나그네가 등에 지는 게 행낭이라면 머리에 쓰는 게 죽립이야.
그러니까 죽립을 썼다는 건 길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시야. 집에 있는 사람은 안 써.
근데 무협에선 죽립이 얼굴을 가리는 데 더 많이 쓰여.
깊게 눌러쓰면 눈이 안 보여. 그러면 누군지 몰라. 핼러윈 가면 얘기할 때 무협 복면은 이름을 숨긴다고 했잖아. 죽립은 그거보다 덜 수상해. 복면은 대놓고 숨기는 거지만, 죽립은 그냥 비 가리개처럼 보이거든.
그래서 정체를 숨긴 고수, 쫓기는 사람, 이름난 인물이 조용히 다니고 싶을 때 죽립을 써.
무협에서 죽립의 핵심은 벗는 순간이야.
한참 구석에 앉아 있던 나그네가 일이 터지면 죽립을 벗어. 그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객잔이 술렁여. 다들 아는 얼굴이거든. 소문으로만 듣던 고수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거나.
죽립은 정체를 아껴두는 장치야. 독자도 객잔 손님처럼 그 얼굴을 기다려.
비 오는 날 우리 객잔에도 삿갓 쓴 손님이 들어왔어. 진짜로 비 가리려고 쓴 거였지.
근데 그 손님이 삿갓을 벗기 전까지 다들 숨죽이고 쳐다봤어. 무협을 너무 읽은 거야. 벗고 보니 동네 장에서 채소 파는 아저씨였어. 다들 웃었지.
삿갓 벗는 장면 중에 소름 돋았던 거 있으면 들려줘. 그 순간이 무협에서 제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