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읽다 보면 이런 장면이 있어. 주인공이 어느 날 알게 돼. 어릴 때 부모끼리 정해둔 혼약이 있대. 상대는 이름만 들어본 세가의 딸이고.
주인공은 기억도 안 나. 근데 상대 집안은 그 약속을 들고 찾아와. 그때부터 이야기가 꼬여.
이게 정혼이야.
정혼은 대개 두 집안의 약속이야. 친한 친구끼리, 은혜 입은 사이끼리, 손잡을 필요가 있는 세가끼리.
그러니까 정혼은 사랑이 아니라 관계에서 시작돼. 무협 관계 정리 얘기할 때 사람이 엮이는 방식이 여섯이라고 했는데, 정혼은 그중 몇 개가 한 번에 엮이는 자리야. 집안, 은혜, 체면.
정혼이 사건이 되는 이유는 약속은 그대로인데 사정이 바뀌어서야.
약속할 땐 두 집안이 비슷했어. 근데 몇 년 뒤에 한쪽이 몰락해. 그러면 잘나가는 쪽은 약속을 없던 일로 하고 싶어 해. 몰락한 쪽은 그 약속이 마지막 남은 끈이고.
서자 적자 얘기할 때 무협은 바닥에서 시작한다고 했잖아. 몰락한 집안의 정혼자는 그 바닥에서 약속 하나를 쥐고 찾아가는 사람이야.
그래서 무협에서 파혼 장면이 자주 나와. 잘나가는 쪽이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깨. 몰락한 쪽은 굴욕을 당하고.
그 굴욕이 주인공을 움직여. "두고 봐라." 하고 이를 악무는 거지. 그다음 이야기는 대개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쪽으로 가.
반대로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쪽도 있어. 상대가 몰락해도 약속은 약속이라며 손을 놓지 않는 사람. 무협에선 그런 인물이 대개 협을 아는 사람으로 그려져.
객잔에서 이 얘기를 하는데 손님 하나가 웃었어. 부모님이 어릴 때 옆집 아이랑 결혼시키겠다고 농담하던 게 생각난대.
다들 그런 얘기 하나씩 있더라. 물론 지금은 다 웃는 얘기지. 근데 무협은 그 농담 같은 약속을 진지하게 지켜야 하는 세계야. 그게 무거우면서도 좀 부러워.
정혼이 얽힌 이야기 중에 결말이 좋았던 거 있으면 들려줘. 약속이 사람을 살린 쪽이면 더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