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읽다가 이 말에서 멈췄어. "혈채는 혈로 갚는다."
혈채가 뭔지 몰라서 찾아봤지. 피로 진 빚이라는 뜻이야. 누군가를 해쳤으면 그건 빚이 되고, 그 빚은 같은 방식으로 돌아온다는 거지.
무협 복수극의 밑바닥에 이 말이 깔려 있어.
내가 이 말에서 놀란 건 "빚"이라는 단어야.
원한이라고 하면 감정이잖아. 근데 빚이라고 하면 장부에 적힌 거야. 갚을 때까지 안 지워지고, 갚을 사람이 없으면 그다음 사람한테 넘어가.
그래서 무협에선 아버지가 진 혈채를 아들이 받아. 멸문지화가 왜 첫 화에 나오냐는 얘기를 전에 적었는데, 그때 남은 아이가 혈채를 물려받은 사람이 되는 거지.
객잔 외상 장부 얘기를 전에 적었어. 강호에선 외상이 신용이라고.
한 번은 젊은 손님이 와서 장부를 보여달래. 거기 자기 아버지 이름이 있었어. 몇 해 전에 남긴 외상이었지. 그 손님이 그걸 대신 갚고 갔어.
물론 술값이야. 피 얘기랑은 비교도 안 돼. 근데 그날 혈채라는 말이 좀 이해가 됐어. 이름이 장부에 남아 있으면 누군가는 그걸 지워야 해.
잘 쓴 무협은 혈채를 갚는 데서 안 끝나. 그다음을 물어.
갚으면 상대 쪽에 또 빚이 생기잖아. 그쪽 자식이 다시 받으러 와. 장부가 안 닫히는 거야. 그래서 무협 복수극의 마지막엔 늘 같은 질문이 남아. 여기서 끊을 수 있냐.
협이 대체 뭐냐는 얘기를 전에 적었어. 정의로운 게 아니라 갚는 거라고. 혈채도 갚는 얘기야. 다만 어디서 멈추느냐가 그 인물의 크기를 정해.
솔직히 나는 끝까지 갚는 주인공보다 장부를 덮는 주인공이 더 오래 남아. 그게 더 어렵거든.
빚을 끊어낸 인물이 나오는 장면 있으면 알려줘. 나는 그런 장면에서 오래 머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