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한 분이 대출 카드처럼 생긴 종이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책 행사에서 받은 거라고요. 거기서 소방관 한 분을 "빌려" 삼십 분 동안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시더군요. 책에서 읽은 어떤 이야기보다 오래 남는다고요.
사람책 도서관, 혹은 휴먼 라이브러리라고 부르는 행사가 있습니다. 덴마크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도서관이나 지역 행사에서 종종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죠.
방식은 이렇습니다. 자기 경험을 들려줄 사람이 "사람책"이 되고, 듣고 싶은 사람이 "독자"가 되어 그 사람을 정해진 시간 동안 빌립니다. 마주 앉아 묻고 듣는 거죠.
사람책이 되는 이들은 다양하다고 합니다.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 남들이 잘 모르는 경험을 지나온 사람, 편견의 대상이 되기 쉬운 사람들이요. 직접 만나 보면 편견이 줄어든다는 뜻에서 시작된 행사라고 들었습니다.
소방관을 빌린 손님. 뉴스에서만 보던 일을 그 사람의 목소리로 들으니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고요. 무서웠던 순간보다 동료 얘기를 더 많이 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책이 되어 본 이웃. 귀농한 경험을 들려줬는데, 독자 한 사람이 자기도 준비 중이라며 메모를 빼곡히 하더라고요. 누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 준 게 처음이었다고 하시더군요. 대학생 손님. 낯선 사람과 삼십 분 이야기하는 게 무서웠는데, 막상 해 보니 시간이 짧았다고요.
조금 부럽기도 했습니다. 서가의 책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하니까요. 사람책은 되묻고, 웃고, 머뭇거리는 책이죠.
그래도 둘이 닮은 점이 있더군요. 사람책도 결국 읽는 사람이 귀를 열어야 펼쳐집니다. 앞서 남의 일기를 읽는 자리를 적었는데, 서간집과 일기가 서가에 남는 까닭도 결국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일 겁니다.
모든 사람은 아직 읽히지 않은 책이다. 펼치는 손이 없으면 그 책은 끝내 덮인 채로 남는다.
그 손님은 다음 행사에도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엔 자기가 사람책으로 신청해 볼까 고민 중이라고요. 들려줄 이야기가 있을지 모르겠다며 웃으셨죠.
모든 사람에게는 들려줄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저는 종이책이든 사람책이든, 누군가의 이야기가 펼쳐질 자리를 지키며 그 귀 기울임을 이 서가에서 이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