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두 개를 들고 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기증하시겠다고요.
대부분 못 받는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자리에 한참 서 계셨습니다. 상자를 도로 들고 나가시는 뒷모습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순서를 먼저 알려드렸어야 했습니다.
먼저 이것부터 말씀드리는 게 낫겠죠. 기증을 받긴 하는데 받는 비율이 낮습니다.
받는 건 대체로 깨끗하고, 아직 찾는 사람이 있고, 우리에게 없는 책입니다. 상자 하나에서 두세 권 나오면 많이 나온 편이죠.
기증을 먼저 떠올리시면 거의 실망하십니다. 저는 이 순서를 권합니다.
하나, 팔 수 있는 것부터. 중고서점이나 중고 거래로 갑니다. 상태가 괜찮고 아직 찾는 사람이 있는 책은 여기서 대부분 나갑니다.
둘, 줄 사람을 찾습니다. 아는 사람, 동네 나눔, 작은도서관, 지역 카페의 책장. 특정한 사람에게 가는 게 가장 잘 쓰입니다.
셋, 그다음이 기증입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남은 책이면 도서관에 물어보시면 됩니다. 가져오시기 전에 목록을 먼저 보내시면 헛걸음을 안 하시죠.
넷, 남은 건 재활용으로. 이게 마지막입니다.
버리는 게 아까워 미루시는 분이 많은데, 마지막 단계도 알아두시면 덜 불편합니다.
책은 종이류로 분리배출합니다. 다만 표지가 코팅됐거나 비닐이 씌워진 것은 떼어내야 하고, 스프링이나 금속 부분도 빼야 하죠. 하드커버는 겉장을 분리하는 게 원칙입니다.
양이 많으면 폐지 수거하는 곳에 물어보시는 편이 낫습니다.
이 얘기를 실무로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책을 버리기 어려운 데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책은 사놓고 못 읽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걸 버리는 건 읽으려던 나를 버리는 것 같아서 손이 안 나가는 거죠. 저는 그 마음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다만 안 읽은 책이 계속 쌓여 있으면, 그 책장은 읽을 목록이 아니라 못 지킨 약속의 목록이 됩니다. 그 앞에 서면 새 책을 펼 마음이 안 들죠.
비우는 일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채워두기만 한 시간이 아까운 것이다.
전부를 판단하시려면 하루가 갑니다. 저는 기준 하나만 정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다시 펼 것 같은가. 그것만 물으시면 됩니다. 아까워서 남기는 것과 다시 볼 것 같아서 남기는 건 다르거든요.
상자를 도로 들고 나가셨던 그분은 다음에 목록을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중 네 권을 받았고, 나머지는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알려드렸죠. 그날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