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째 같은 분야 책을 빌려 가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진도가 안 나간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처음 오셨을 때와 빌려 가시는 책이 분명히 달랐습니다. 본인만 모르셨죠.
이 느낌이 생기는 구조는 단순합니다.
남의 변화는 결과로만 봅니다. 무언가를 끝냈다, 자리를 옮겼다, 시작했다 같은 소식이죠. 그 사이의 지지부진한 시기는 안 보입니다.
내 변화는 매일 봅니다. 매일 보면 안 바뀐 것처럼 느껴지죠. 그래서 같은 자에 남의 완성본과 내 하루가 놓입니다.
앞서 남의 정점과 비교하게 된다는 얘기를 다른 자리에서 적었는데 같은 셈법입니다.
여기는 갈라두는 게 좋겠습니다.
안 가는 것은 몇 해 전과 지금 하는 게 똑같은 상태입니다. 이건 실제로 멈춰 있는 거죠.
느린 것은 가고 있는데 눈금이 크게 안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대개 눈금을 잘못 잡아서 그렇습니다. 권수나 횟수 같은 걸로 재면 안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제가 그분께 여쭤본 게 이겁니다. 삼 년 전에는 이 분야 책이 어떠셨느냐고요.
한참 생각하시더니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아니시고요. 권수는 안 늘었는데 읽히는 정도가 달라진 겁니다. 그건 눈금에 안 잡히죠.
앞서 한 분야를 처음 공부하는 순서에서 세 권째쯤 갑자기 편해진다고 적었는데, 그 변화도 세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습니다. 한 자리에 오래 있는 게 늘 손해는 아닙니다.
여러 데를 빨리 지나간 사람은 폭이 넓고, 한 자리에 오래 있은 사람은 깊습니다. 앞서 쉽게 질리는 성격에서 적은 것과 반대편 얘기죠. 둘 다 쓸모가 있고, 지금 어느 쪽인지는 본인이 고른 게 아닐 때도 많습니다.
나무는 자라는 동안 자기가 자라는 줄 모른다. 그래서 매일 보는 사람만 못 알아본다.
조급해지실 때 저는 이걸 권합니다. 어제와 비교하지 마시고 몇 해 전과 비교해보십시오.
어제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안 바뀌어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삼 년 전과 비교하면 대개 달라져 있죠. 그 사이가 안 보였을 뿐입니다.
그분은 요즘도 같은 분야를 빌려 가십니다. 다만 진도가 안 나간다는 말씀은 안 하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