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읽다 보면 이런 대사가 자주 나와. "천지신명께 맹세하건대."
하늘과 땅의 신께 걸고 약속한다는 뜻이야. 그 말을 하고 나면 그 인물은 그 약속에서 도망칠 수 없게 돼.
나는 처음에 이게 그냥 과장된 말투인 줄 알았어. 근데 무협에선 이 말이 진짜로 무거워.
보통 약속엔 증인이 있어. 사람이 보고 들어. 근데 맹세는 하늘을 증인으로 세우는 거야.
사람 증인은 죽거나 잊을 수 있어. 하늘은 안 그래. 그러니까 맹세를 깨면 어디로도 숨을 수 없다는 뜻이야. 무협 인물들이 맹세를 목숨처럼 여기는 이유가 그거지.
혈서 얘기를 전에 적었어. 피로 쓰면 뭐가 달라지냐고. 혈서가 몸을 걸고 하는 약속이라면, 맹세는 하늘을 걸고 하는 약속이야.
무협에서 맹세는 대개 사람을 묶는 장치로 쓰여.
의형제가 될 때, 원수를 갚겠다고 할 때, 비밀을 지키겠다고 할 때. 한 번 맹세하면 그 인물은 그 길로만 가야 해. 정혼 얘기할 때 약속은 남는데 사정이 바뀐다고 했잖아. 맹세는 사정이 바뀌어도 절대 안 풀리는 약속이야.
그래서 무협에서 제일 괴로운 장면 중 하나가 두 맹세가 부딪힐 때야. 하나를 지키면 다른 하나를 깨야 하는.
무협에서 맹세를 깨는 인물은 대개 끝이 안 좋아.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처럼 그려지지.
근데 잘 쓴 글은 그걸 단순하게 안 써. 맹세를 깬 이유가 있어. 더 큰 걸 지키려고 깬 거야. 그러면 독자는 그 인물을 미워할 수가 없어.
객잔에서 외상 갚겠다는 손님이 농담으로 그러더라. "하늘에 맹세한다!" 다들 웃었지.
근데 그 손님이 다음 날 진짜로 갚으러 왔어. 농담이었는데 말이 걸렸대. 하늘에 걸고 말했으니까 안 갚으면 찜찜하다고. 나는 그 손님이 무협 인물 같았어.
맹세를 끝까지 지킨 인물이나 깨버린 인물 중에 기억나는 사람 있으면 들려줘. 둘 다 사연이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