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실에서 한 손님이 자주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한 시간에 한 번쯤 일어나 서가 사이를 몇 바퀴 걷고 돌아오시죠. 왜 그러시느냐 여쭈니, 앉아만 있으면 생각이 막힌다고 하시더군요. 걸으면 풀린다고요.
니체가 들었으면 무릎을 쳤을 이야기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에 이 제목의 장이 있죠. 차라투스트라는 몸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하죠.
신체는 하나의 큰 이성이다. 그리고 네가 "정신"이라 부르는 것, 그 작은 이성도 신체의 도구라고요.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네 생각과 느낌 뒤에는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그 이름은 자기다. 그는 네 신체 안에 살고, 그가 곧 네 신체다.
오랫동안 많은 생각은 머리를 위에, 몸을 아래에 두었습니다. 정신은 고귀하고 몸은 그걸 담는 그릇일 뿐이라고요.
니체는 이 순서를 뒤집습니다. 생각은 몸에서 나오고, 몸이 피곤하면 생각도 흐려지고, 몸이 살아 있으면 생각도 살아난다는 거죠. 몸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제 큰 이성을 무시하는 것이라고요.
니체는 실제로 많이 걸었습니다. 산과 호숫가를 몇 시간씩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고 하죠. 『우상의 황혼』에는 이런 짧은 말도 있습니다. 걸으면서 얻은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
앞서 몸이 성치 않았던 니체를 몇 번 적었는데, 그래서 더 몸의 말에 귀를 기울였는지도 모릅니다.
앉아서 짜낸 생각을 너무 믿지 마라. 몸이 걸으며 건넨 생각에 먼저 귀를 기울여라.
막힐 때는 일어나십시오. 그 손님처럼 몇 바퀴 걷는 것만으로 생각의 방향이 바뀌곤 합니다. 지친 날엔 판단을 미루십시오. 피곤한 몸이 내린 결론은 대개 어둡습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적어 보십시오. 어떤 일 앞에서 어깨가 굳는지, 어떤 사람 앞에서 숨이 편한지. 머리보다 먼저 아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건 몸을 돌보는 조언이라기보다, 몸을 생각의 동반자로 대하라는 니체의 제안에 가깝습니다.
그 손님은 요즘도 한 시간에 한 번씩 서가 사이를 걸으십니다. 가끔은 걷다가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돌아오시죠. 걷다 보면 생각만 풀리는 게 아니라 책도 만난다고 하시더군요.
머리만으로 사는 날이 많습니다. 그래도 저는 막힐 때마다 일어나 걷고, 몸이 건네는 큰 이성의 말을 들으며 제 생각을 다시 세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