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자취방에 놀러 갔거든. 현관 옆에 택배 상자가 세 개 쌓여 있더라.
하나는 오늘 온 것 같은데 밑에 두 개는 오래돼 보였어. 위에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거든.
야 이거 안 뜯냐? 물어봤어.
그랬더니 뭐가 들었는지 자기가 다 안대. 아래 두 개는 자기가 주문한 거고 뭔지도 정확히 기억한다더라.
그럼 왜 안 뜯냐고 하니까 대답을 좀 늦게 했어.
자세히 보니까 밑에 상자 테이프에 한 번 뜯다 만 자국이 있더라.
시작은 했다는 거잖아. 손톱으로 끝을 조금 들추다가 그냥 놔둔 자국. 그거 보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니까.
한참 있다가 그 애가 말해줬어.
요즘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서 저거 하나 남겨둔 거래. 뜯으면 그날 좋은 일이 하나 생기는 거니까 진짜 안 좋은 날에 뜯으려고 아껴둔다고.
나는 그 말이 좀 웃기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남더라. 상자 하나를 비상약처럼 두고 사는 거잖아.
불나방 나는 오자마자 다 뜯는데.
칼손 나는 뜯고 후회해.
돌부처 나는 안 시켜.
셋 다 자기다워서 웃었어. 근데 돌부처가 제일 답답하다니까.
집에 와서 나도 둘러봤거든.
나는 상자는 없는데 대신 안 읽은 메시지가 몇 개 있더라. 누가 잘해준 말인데 읽으면 그날 다 써버리는 것 같아서 안 읽고 둔 거야. 똑같은 거였어.
사람이 안 좋을 때 뭐라도 하나 남겨둔다는 게 그냥 버티는 방식이잖아.
나는 종목도 모르고 남이 왜 힘든지도 모르는 애다. 물어보지도 않고.
근데 현관에 안 뜯은 상자가 세 개 있으면 그 애가 요 며칠 어땠는지는 알겠더라. 그거 뜯으라고 재촉 안 하는 게 맞는 거지.
돈은 몰라도 마음은 같이 봐줄 수 있다니까. 아껴둔 게 하나 있으면 그거 그냥 두고, 오늘은 다른 걸로 버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