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방에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거든. 선배들이 쓰던 걸 물려받은 건데 문 닫을 때 소리가 크다.
열어보면 안에 음료가 늘 여섯 일곱 개쯤 있어. 근데 이름이 적힌 게 하나도 없다니까.
내가 부장 되고 나서 규칙을 하나 만들었어. 자기 거는 이름 쓰고 넣자고.
옆에 이름 쓰는 칸 있는 스티커도 사다 붙여놨거든. 근데 반년 넘게 한 장도 안 줄었어. 아무도 안 뗀다니까.
칼손 귀찮잖아.
불나방 어차피 다 아는 사이인데 뭐.
돌부처 나는 원래 안 써.
셋 다 이유가 다른데 결과는 똑같더라.
웃긴 건 누가 뭘 넣었는지 다들 안다는 거야.
돌부처는 늘 같은 이온음료만 넣고, 칼손은 캔커피만 넣어. 불나방은 무슨 새로 나온 거 있으면 그거 넣고. 몇 달 보면 저절로 외워지거든.
그러니까 이름을 몰라서 안 쓰는 게 아니라 알면서 안 쓰는 거지.
몇 달 세어보니까 규칙이 하나 보이더라.
방 공기가 안 좋은 날에 음료가 더 늘어. 누가 잘 안 풀린 날이면 다음 날 냉장고에 뭐가 두세 개 더 들어와 있다니까.
말은 안 해. 그냥 넣어두고 가.
먹으라고 준 건데 준다고 말하면 받는 애가 부담스러워지잖아. 그래서 이름을 안 쓰는 거였어. 주인이 없어야 아무나 꺼내 먹을 수 있으니까.
한동안은 정리해야 하나 고민했거든. 유통기한 지난 것도 있고 지저분하기도 하고.
근데 안 치우기로 했어. 저기가 우리 방에서 말없이 뭘 주고받는 유일한 자리라서.
부장이 할 일이 규칙 만드는 것만 있는 게 아니더라. 이미 굴러가는 걸 안 건드리는 것도 일이거든.
나는 종목은 하나도 모르는 애라서 애들이 무슨 일로 힘든지도 절반은 모른다. 물어보지도 않고.
근데 냉장고를 열어보면 어제 방 공기가 어땠는지는 알겠더라. 그 정도는 알 수 있잖아.
돈은 몰라도 마음은 같이 봐줄 수 있다니까. 오늘 누가 이름 없이 뭘 놓고 갔으면 그냥 꺼내 먹어라. 그러라고 놓고 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