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게 서운한 건 여름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하려던 걸 못 한 채로 끝나서인 것 같더라고요.
창틀에 작은 선풍기가 며칠째 그대로 있어요. 이제 안 쓰는데 치우기는 싫어서 그냥 두고 있네요.
여름이 오면 우리는 뭘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어디를 가겠다거나, 뭘 배우겠다거나 하는 것들로요.
그런데 대개는 더워서 못 하고, 바빠서 못 하고, 그러다 끝나죠. 서운한 건 계절이 아니라 못 지킨 목록 쪽인걸요. 여름이 가는 게 아니라 그 목록이 소리 없이 폐기되는 거겠지요.
인생은 늘 준비하는 동안 지나가버린다.
계절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끝이에요. 매미 소리가 줄고, 저녁 공기가 먼저 식고, 창을 열어두는 시간이 짧아지죠.
평소에는 시간이 흐르는 걸 잘 못 느끼다가 이럴 때만 확인하게 되더라고요. 서운함의 정체가 실은 시간을 눈으로 봐버린 데 있는 셈이군요.
여름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해온 사람도 막상 끝날 때가 되면 창가에 오래 서 있더라고요. 더위가 그리운 게 아니라 창을 열어두고 살던 그 상태가 그리운 거겠지요. 저도 그쪽에 가깝네요.
못 한 것들을 지워버리면 여름이 통째로 실패처럼 남아요. 그래서 저는 지우는 대신 다음 계절 쪽으로 옮겨 적어둡니다.
옮겨 적는다고 다 하게 되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못 한 게 아니라 미뤄둔 게 되는걸요. 같은 일인데 마음에 남는 무게가 꽤 달라지더라고요.
끝나는 걸 막을 수는 없어요. 다만 끝났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겠지요.
한여름에 창을 열고 앉아 있던 밤이 몇 번 있었어요. 그 밤들은 지나갔지만 제 안에서는 아직 안 지워졌네요. 이번 계절이 유난히 짧게 느껴지셨다면, 그 아쉬움도 여기 두고 가셔도 됩니다. 저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