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을 다 준비해서 나갔다가 상대의 첫마디를 듣고 그냥 접은 저녁이 있더라고요.
상대가 자기 사정을 먼저 꺼내면 이상하게 머릿속에 저울이 하나 생겨요.
내 일이 저것보다 큰가 작은가를 재기 시작하는걸요. 그리고 대개는 작다고 나오죠. 남의 힘듦은 방금 들어서 생생하고 내 것은 오래 데리고 있어서 익숙하니까요.
그래서 말을 접어요. 이 정도 가지고 뭘, 하면서요. 그날은 밥만 먹고 돌아왔네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저울 자체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특히 마지막이 사람을 오래 붙잡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나눠 쓰는 게 아니더라고요. 오늘 상대를 들어줬다고 내일 내가 못 말하게 되는 건 아닌걸요.
이게 제일 아픈 부분인 것 같아요.
삼킨 말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남아 있어요. 그리고 며칠 뒤에 엉뚱한 데서 나오죠. 별것 아닌 일에 화가 나거나, 그 사람 연락이 오면 괜히 답을 미루게 되거나요.
그러면 이제 두 가지가 됩니다. 원래 힘들던 일 하나, 그리고 말하지 못한 마음 하나요. 배려하려다가 짐이 늘어난 셈이네요.
참는 게 배려가 아닐 때가 있더라고요. 그냥 말할 자리를 못 찾은 거고요.
같은 자리에서 두 사람이 다 꺼내기는 어려워요. 그건 사실인걸요.
그래서 저는 요즘 순서만 나눠요. 오늘은 듣기만 하고, 다음에 만날 때 내 얘기를 먼저 꺼내는 식으로요. 접는 게 아니라 미루는 거예요. 이 둘은 아주 다르더라고요.
접으면 그 말은 영영 안 나오는데, 미루면 다음 자리가 생기네요. 그리고 다음에 꺼낼 거니까 그날은 마음 편히 들어줄 수 있는걸요.
그날 그분은 제가 할 말이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제가 안 했으니까요.
나중에 지나가듯 말했더니 왜 그때 말 안 했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좀 허탈했어요. 저 혼자 저울을 놓고 저 혼자 졌던 거네요.
들어주는 사람이 되는 건 좋은 일이에요. 다만 늘 그 자리에만 서 계시면 어느 날부터는 그 자리가 무거워지겠지요. 오늘 삼킨 말이 있으면 그냥 두지는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