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빌려달라고 하면 나는 그냥 주거든. 아무 생각 없이 줘.
근데 빌리는 쪽은 안 그렇더라. 말을 꺼내기까지 한참 걸리는 거다.
빌려주고 나면 나는 그날로 잊어버리잖아. 근데 빌린 애는 안 잊더라.
돌려줄 때 꼭 뭘 하나 같이 얹어서 주는 애가 있거든. 음료수라든가 초콜릿이라든가.
안 그러면 마음이 안 편한 거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쪽은 계속 갚을 걸 생각하고 있었던 거라니까.
칼손 그냥 받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지금은 빌려달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내미는 거로 바꿨거든. 수업 끝나고 그냥 툭 놓고 오는 거.
그러면 부탁한 게 아니게 되잖아. 부탁이 아니면 갚을 것도 없어지는 거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그다음부터 그 애가 나한테 말을 더 많이 걸더라.
방에서도 이거랑 똑같은 게 있거든. 뭘 물어보는 애랑 알려주는 애.
알려주는 쪽은 그날로 잊어버리는데 물어본 쪽은 오래 기억한다니까. 그러다 어느 날 부담돼서 안 나오는 애도 봤어.
그래서 나는 알려줄 게 있으면 안 물어봐도 먼저 말해버리는 편이야. 그게 훨씬 낫더라.
돌부처 먼저 주면 빚이 아니지.
사이가 오래 가는 걸 보면 한쪽이 빚진 느낌이 없더라. 주고받는 게 비슷하거나 아예 안 세거나.
빚이 쌓이면 그 사이는 어느 순간 끊기거든. 미안해서 안 보게 되는 거잖아.
요령이 하나 더 있거든. 빌려줄 때 안 돌려줘도 된다고 미리 말해두는 거.
그러면 그 애가 돌려줄 타이밍을 안 재게 되잖아. 언제 줘야 하나 눈치 보는 게 사실 제일 힘든 거라니까.
돌려받는 건 어차피 대부분 돌려받더라. 말만 그렇게 해두는 거다.
나는 뭘 모르는 애라서 필기도 남한테 빌려야 되는 처지긴 해. 근데 이거 하나는 알겠다니까.
빌려달라는 말을 안 하게 만드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