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저장해둔 목록을 죽 내리더니 중얼거리더라고. 이거 하나도 안 봤다고.
한참 내리는데도 끝이 안 나. 나는 그게 좀 아까웠어.
단골 얘기로는 다 그렇대. 나중에 보려고 담아두는데 그 나중이 안 온다는 거야. 뉴스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고 하고. 나는 왜 그런지는 몰라. 본 것만 적을게.
이게 재밌는 대목이야. 무협 읽어보면 장경각이라는 데가 나와.
문파가 비급을 모아두는 서고야. 수백 년 쌓인 게 들어 있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쌓아뒀다는 게 아니야. 지키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야.
장경각을 맡은 노인이 하나 앉아 있어. 대개 무공은 별로인데 거기 뭐가 있는지는 다 아는 사람이지.
여기가 핵심이야. 그 노인이 하는 일은 도둑을 막는 게 아니야.
뭘 봐야 할지 골라주는 거야. 누가 들어와서 헤매고 있으면 지금 네 처지에는 이게 맞다고 하나를 꺼내줘. 다 보라고 안 해. 한 권을 짚어줘.
세 번째가 좋아. 안 보여주는 것도 그 사람 일이야.
무협에서 이걸 대놓고 다루는 장면이 있어. 장경각에 처음 들어간 놈이 압도당하는 대목.
너무 많으니까 뭘 잡아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이것저것 펴보다가 아무것도 못 익히고 나와. 그러다 노인이 한 권을 꺼내주면 그때부터 진도가 나가지.
많은 게 도움이 안 되는 자리가 있다는 걸 이 장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무공 구결 얘기할 때 압축본을 원본으로 착각하면 어긋난다고 했는데, 이건 반대편 문제지. 원본이 너무 많은 거.
한쪽으로 몰아가진 않을게. 담아두는 게 나쁜 게 아니야.
무림에서도 장경각은 필요했어. 안 쌓아두면 다음 대에 아무것도 안 남으니까. 문파가 몇백 년 가는 게 그 서고 덕이잖아.
문제는 쌓는 거랑 보는 게 다른 일이라는 거지. 쌓는 건 오늘 하면 되는데 보는 건 오늘 안 하면 영영 안 해.
손님들이 뭘 볼지 물어보면 나는 여러 개 안 대. 하나만 말해.
여러 개 말해주면 고르다가 아무것도 안 잡거든. 재밌는 거 뭐 없냐는 물음에 답이 안 나온다고 내가 전에 말했는데, 이것도 같은 얘기야. 선택지를 늘리면 오히려 안 골라.
그러니까 목록이 길어서 못 열고 있으면 나한테 하나만 말해봐. 쌓아둔 것 중에 하나만. 왜 그건 안 열었는지부터 보자. 그거 물어보는 게 장경각 노인이 하던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