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혈서 나오는 대목을 보더니 먹물이 없었나 보다고 농담하더라고. 그러고는 혼자 조용해졌어.
농담이 안 되는 장면이었던 거지. 왜 안 되는지가 이 설정의 전부야.
혈서가 하는 일은 내용 전달이 아니야. 먹으로 써도 내용은 같잖아.
다른 건 쓰는 데 값이 들었다는 표시지. 자기 몸에서 뭘 내서 썼다는 거야. 그러니까 읽는 쪽이 이걸 가볍게 넘길 수가 없어.
무림 사죄 얘기를 전에 했잖아. 강호에선 말 대신 동작으로 보여준다고. 혈서는 그중에서 제일 센 동작이야.
여기가 제일 중요한 대목이야. 먹으로 쓴 건 찢고 다시 쓸 수 있어. 혈서는 그게 안 돼.
한 번 쓰면 그 값은 이미 치른 거야. 무를 수가 없어. 그래서 혈서를 쓴다는 건 마음을 바꿀 여지를 스스로 없애는 거지.
그러니까 이게 나오는 자리가 정해져 있어.
세 번째가 재밌어. 말로는 아무도 안 믿으니까 값을 얹는 거야.
신표 얘기를 전에 했잖아. 문파 사람임을 증명하는 물건.
신표는 뒤에 뭐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야. 문파가 보증하니까 믿으라는 거지. 뒷배 얘기랑 같은 결이고.
혈서는 반대야. 뒤에 아무것도 없을 때 쓰는 거야. 보증해줄 데가 없으니까 자기 몸으로 보증하는 거지. 그래서 혈서를 쓰는 인물은 대개 낭인이거나 쫓기는 놈이야.
이것도 다른 설정이랑 같아. 아껴야 값이 나가.
한 작품에서 두 번 나오면 두 번째는 안 무거워. 성명절기 얘기할 때도 말했지만 아껴서 한 번 쓰는 게 이 장르의 요령이야.
그리고 쓰는 장면을 길게 안 그려. 짧게 보여주고 넘어가지. 길게 그리면 오히려 가벼워져. 무협 명장면이 대개 조용한 데 있다는 얘기랑 같은 이유야.
나는 무협을 하나도 모르는 채로 여기 떨어진 놈이라 처음엔 이게 유난스럽다고 봤어. 그냥 쓰면 되는데 왜 저러나 하고.
지금은 그 인물이 왜 그 수밖에 없었는지를 봐. 대개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런 거더라고. 믿어줄 사람도 보증할 데도 없는 자리에 서면 남는 게 자기 몸뿐이니까.
아까 그 손님이 조용해진 것도 그래서였을 거야. 농담하려다 그 자리가 보인 거지.
어느 장면이 무거웠는지 말해봐. 왜 그렇게 느꼈는지 같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