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만 노트를 다시 펴는 게 새 노트를 사는 것보다 어렵더라고요. 앞장에 제가 남아 있어서요.
서랍에서 노트를 꺼냈는데 첫 두 장만 빼곡했어요. 나머지는 그대로 백지였네요.
노트를 펴면 그때 열심이던 글씨가 먼저 보입니다. 날짜도 또박또박 적혀 있고요.
그 옆에 비어 있는 날들이 이어지니 실패한 기록처럼 읽히는걸요. 다시 시작하려고 폈다가 그 대조에 마음이 꺾이는 셈이군요. 그래서 그냥 덮게 되더라고요.
우리를 가로막는 건 앞으로 할 일이 아니라, 지난번에 못 한 기억이다.
다시 시작하려면 그동안 안 쓴 날부터 메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생각 때문에 몇 번을 못 폈어요.
밀린 걸 다 채우려면 시작부터 큰일이 되는걸요. 그러다 이번 주는 지났으니 다음 달 첫날부터 하자고 미루게 되겠지요. 그렇게 미룬 첫날이 저는 여러 번 있었네요.
요즘은 빈 날을 안 채웁니다. 노트를 펴서 그냥 오늘 자리에 적어요.
중간이 비어 있어도 상관없더라고요. 이 노트는 남에게 보일 것도 아니고 완성해야 하는 것도 아닌걸요. 비워둔 채로 이어 쓰면 되는 셈이겠지요.
예전에는 다시 시작할 때마다 새 노트를 샀어요. 깨끗한 데서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새 노트도 두 장 쓰고 멈추더라고요. 문제는 노트가 아니었던 셈이군요. 요즘은 있는 걸 그냥 다시 폅니다. 사는 데 드는 돈은 안 쓰고요.
꾸준히 못 한다고 그 일이 나와 안 맞는 건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멈췄다 다시 펴는 것도 그 나름의 방식이겠지요. 오늘 서랍에서 쓰다 만 노트를 발견하셨다면, 앞장은 그냥 두시고 오늘 자리에 한 줄만 적어보셔도 되는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