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손님이 목록을 내리다 말고 나한테 물었어. 이거 아까 그거 아니냐고. 아니라고 했더니 조금 있다가 또 묻더라고.
세 번째 물었을 때 나도 화면을 같이 봤지. 그런데 진짜 비슷해. 넉 자짜리 한자어 두 덩이가 붙어 있고, 뒤에 무슨무슨 회귀니 절대니 하는 말이 붙어 있어.
이게 성의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야. 일부러 그렇게 짓는 거거든.
여기서 착각하기 쉬운 게 있어. 제목이 그 이야기를 요약한 거라고 생각하잖아.
아니야. 무협 제목은 간판이야. 객잔 문 앞에 걸린 나무판이랑 같은 거지. 그 안에서 뭘 파는지, 술이 있는지 밥이 있는지, 값이 센지 싼지를 지나가는 놈이 걸음을 안 멈추고도 알아채야 해.
멈춰서 읽어봐야 아는 간판은 간판 노릇을 못 하는 거야. 그러니까 다들 비슷하게 생길 수밖에 없어.
익숙해지면 제목만 봐도 대충 결이 잡혀. 나도 처음엔 하나도 몰랐는데 이제는 좀 보여.
이게 정확한 분류는 아니야. 다만 뭘 기대하고 들어가면 되는지는 알려줘. 그거면 간판으로는 충분하지.
여기서 다들 한 번씩 하는 소리가 있어. 다 똑같으니까 재미없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근데 좀 오래 보니까 알겠더라. 무협은 약속으로 굴러가는 장르거든. 정파와 사파가 있고, 기연이 있고, 사부가 있고. 그 약속을 알고 들어가는 게 이 장르를 읽는 방식이야.
제목이 특이하면 그 약속을 안 지킬 수도 있다는 신호가 돼. 읽는 놈은 그게 불안하지. 그래서 오히려 익숙한 제목이 안심이 되는 거야.
간판이 정직하다고 안에 있는 게 다 같은 건 아니지.
같은 간판을 걸어놓고도 안에서 파는 게 천지 차이인 객잔이 있잖아. 무협도 똑같아. 제목이 비슷한 작품 열 개를 잡아보면 그중 하나만 남아. 나머지는 간판만 따라 지은 거야.
그래서 나는 제목으로 고르지 말라고 해. 제목은 어느 구역인지만 알려주는 거고, 그 안에서 뭘 잡을지는 다른 걸 봐야 해.
나는 두 개만 봐. 별거 아닌데 꽤 맞아.
첫째, 첫 장면이 어디서 시작하냐. 멸문지화부터 시작하는 거랑 산에서 내려오는 거랑은 결이 완전히 달라. 이건 첫 화만 봐도 알아.
둘째, 인물이 몇 명 나오냐. 초반에 이름이 우르르 쏟아지면 문파 얘기 위주로 가는 거고, 두세 명이면 사람 얘기 위주야. 나는 후자가 취향이거든.
제목은 그 두 개를 안 알려줘. 그러니까 간판은 간판으로만 쓰고 문은 열어봐야 해.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읽은 걸 또 잡은 적이 있어. 몇 장 넘기다가 어 이거 봤는데 하고 알아챘지.
무협을 하나도 모르는 채로 여기 떨어진 놈이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고 우기고 다녀. 그래도 좀 창피하긴 해.
너도 헷갈리면 말해봐. 뭘 읽었고 뭘 안 읽었는지부터 정리해줄게. 그거 정리하는 게 사실 제일 재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