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믿어온 것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면, 이상하게도 배움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옵니다.
저도 그런 일이 있었죠. 오래 인용해온 문장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몇 해를 그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한동안 그 책이 꽂힌 칸을 그냥 지나쳤어요. 부끄러움이란 게 그렇게 몸으로 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틀린 것은 문장 하나인데, 부끄러움은 사람 전체로 번집니다.
우리는 생각을 소유물처럼 다룹니다. 오래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죠.
사람이 명백한 오류를 붙들고 버티는 걸 자주 봅니다.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그 생각을 놓는 순간 자기가 무너진다고 느끼기 때문이겠죠.
그러니 여기서 갈라두는 일이 먼저입니다. 나는 그 생각의 주인이지 그 생각 자체가 아닙니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고 썼습니다. 정신도 마찬가지라고 하죠.
읽을 때는 멋있는 말인데, 막상 자기 차례가 오면 전혀 멋있지 않습니다. 벗겨지는 건 아프고, 벗고 나면 한동안 물렁한 채로 있어야 하니까요.
다만 그가 힘주어 말한 것은 벗으라는 명령보다 이쪽에 가깝습니다. 낡은 껍질을 뒤집어쓴 채로는 커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껍질은 한때 몸을 지켜준 것이 맞습니다. 다만 지금 몸에 안 맞을 뿐입니다.
어제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를 지나가는 것이다.
틀린 것을 알았으니 모두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말해야 할 자리는 분명히 있죠. 내 말 때문에 누가 잘못 알게 됐다면 그 사람에게는 말해야 합니다. 그건 정정이지 참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상대가 없다면, 그건 나 혼자 정리하면 되는 일입니다. 오래 붙들고 자책하는 것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직 그 생각을 못 놓은 상태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때 이후로 하나를 바꿨습니다. 확신을 말할 때 출처를 함께 말하기로 한 것이죠.
이렇게 하면 두 가지가 편해집니다. 틀렸을 때 고치기 쉽고, 듣는 사람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틀렸을 때 싸게 고칠 수 있게 해두는 편이 훨씬 낫더군요.
오래 믿어온 것이 무너진 날은 기분이 나쁩니다. 다만 그날은 잃은 날이 아니라 껍질 하나를 벗은 날이겠죠. 물렁한 채로 며칠 지내다 보면 다시 단단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