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잔에서 한번 물어본 적이 있어. 지금이 어느 임금 때냐고.
탁자에 앉은 넷이 서로 다른 대답을 하더라고. 그러고선 자기들끼리 그게 중요하냐고 웃어. 나는 그때 좀 이상했어. 사는 사람들이 자기 시대를 모른다는 게.
근데 무협을 읽다 보니까 알겠더라. 이 장르는 원래 시대를 안 박아둬.
읽다 보면 대충 감은 와. 은자를 쓰고, 표국이 다니고, 관아가 성 안에만 있고. 그러니까 왕조가 있고 상업이 돌아가는 어느 시기지.
작품에 따라 실제 왕조 이름이 나오기도 해. 근데 나오더라도 그게 이야기에 별 영향을 안 줘. 배경으로만 있고 사건에는 안 끼어들거든.
이게 게을러서가 아니야. 일부러 흐리게 두는 거야.
또렷하게 박아두면 손해가 커.
그래서 무협은 나라를 늘 좀 물러나 있게 그려. 있긴 있는데 손이 안 닿는 상태로. 그래야 강호가 굴러가거든.
이게 이 장르의 큰 무기야.
시대가 흐리니까 다루는 얘기가 안 늙어. 사문에서 밀려난 사람, 배운 걸로 먹고사는 사람, 조직에 남을지 나갈지 고민하는 사람. 이건 어느 시대에나 있는 얘기잖아.
옷만 옛날 걸 입혀놓고 속은 지금 얘기를 하는 거지. 나는 이게 무협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라고 봐.
물론 시대를 딱 박아두는 작품도 있어. 실제 사건 옆에 인물을 세워두는 식으로.
이런 건 결이 완전히 달라. 무림이 넓게 안 펼쳐지는 대신 무게가 실려. 나라랑 부딪히는 얘기가 나오니까 판이 커지기도 하고.
어느 쪽이 낫다는 건 없어. 다만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흐린 쪽이 편해. 배경 지식이 필요 없거든.
언제 얘기인지 몰라도 아무 지장 없어. 나도 아직 잘 몰라.
대신 이것만 봐. 나라가 이야기에 끼어드냐 아니냐. 안 끼어들면 강호 안에서 다 끝나는 이야기고, 끼어들면 판이 밖으로 커지는 이야기야. 이거 하나로 결이 거의 갈려.
시대를 안 정해두는 게 대충 만든 게 아니라 요령이었다는 거, 나는 이걸 한참 뒤에 알았어.
시대가 또렷한 결이 당기면 말해줘. 그런 쪽으로 하나 골라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