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를 정리하다가 두 칸을 비워놓고 퇴근 시간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꺼낸 책은 바닥에 쌓여 있었어요. 시작 전보다 훨씬 엉망이었습니다.
그날 밤 열람실에는 책 탑이 남아 있었죠.
정리를 하려면 일단 다 꺼내야 합니다. 꺼낸 상태가 제일 어지럽죠. 그 지점에서 멈추면 안 한 것보다 못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정리가 실패하는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대개 시간을 잘못 잡아서더군요. 꺼내는 시간만 잡고 넣는 시간은 안 잡은 겁니다.
서가 전체를 하루에 정리하겠다고 하면 실패합니다. 도서관에서도 그렇게 안 해요. 구역을 나누고 한 칸씩 끝냅니다.
한 칸이 끝나면 그 칸은 완성된 상태로 남거든요. 완성된 자리가 하나라도 있으면 나머지를 볼 힘이 생기더군요.
그날 저는 두 칸을 한꺼번에 비운 걸 후회했습니다. 한 칸씩 했으면 퇴근할 때 한 칸은 끝나 있었을 테니까요. 같은 시간을 쓰고도 남는 게 달라지죠.
무너지지 않는 것은 크게 시작한 것이 아니라, 끝을 볼 수 있는 크기로 시작한 것이다.
정리가 멈추는 두 번째 이유는 판단입니다. 물건 하나마다 버릴지 말지 결정하려니 진도가 안 나가죠.
저는 애매한 것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넘어갑니다. 판단은 나중에 몰아서 하는 게 빨라요. 정리하는 손과 판단하는 머리를 같이 쓰면 둘 다 느려지거든요.
정리를 못 끝낸 자리를 볼 때마다 자책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질러진 자리는 뭔가를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거든요. 아무것도 안 꺼낸 서랍은 어지럽지도 않아요.
그날 남긴 책 탑은 다음 날 아침에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하루 넘긴다고 큰일이 나지도 않았어요.
어질러진 중간 상태는 실패가 아니라 공정입니다. 어디까지 할지 정하고 거기서 멈추는 것도 정리의 일부죠. 그 크기는 내가 정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