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을 읽다 보면 술자리 장면이 계속 나와. 만나면 마시고, 화해해도 마시고, 싸우기 전에도 마셔.
나는 처음에 이걸 분량 채우기라고 생각했어. 근데 몇 번 겪어보니까 아니더라고. 저 자리에서 실제로 일이 처리돼.
이게 시작이야. 저 세계에는 문서로 남기는 문화가 거의 없어. 도장 찍고 서명하는 자리가 없지.
그러면 약속을 어떻게 하냐면, 사람들 앞에서 말로 해. 그리고 그걸 목격한 사람이 증인이 돼.
그러니까 술자리가 곧 계약 자리야. 누가 누구한테 잔을 권했고, 누가 받았고, 누가 안 받았는지가 전부 기록이지. 종이에 안 적힐 뿐이야.
이거 알고 보면 술자리 장면이 갑자기 재밌어져.
그래서 무협 술자리는 사실 소리 없는 흥정이야. 말은 딴 얘기를 하는데 잔으로 딴 말을 하고 있어.
하나 더. 누가 어디 앉느냐도 정해져 있어. 안쪽 벽을 등지고 앉는 자리가 상석이거든.
이유는 단순해. 등 뒤가 안 열려 있어야 안전하니까. 문을 볼 수 있고 등을 벽에 붙일 수 있는 자리, 그게 무림에서 제일 좋은 자리야.
그러니까 누가 그 자리에 앉는지를 보면 누가 위인지 나와. 그리고 주인공이 굳이 문 쪽에 등을 대고 앉으면, 그건 상대를 그만큼 인정한다는 뜻이거나 자신이 있다는 뜻이지.
술 마시는 장면이 지루하면 대사만 따라가지 말고 손을 봐. 누가 따르고 누가 받고 누가 안 마시는지.
거기서 관계가 다 나와. 오히려 싸움 장면보다 정보가 많아. 싸움은 이기고 지는 것만 알려주지만, 술자리는 앞으로 누가 누구 편이 될지를 알려주거든.
나는 잔을 받아놓고 안 마시는 손님을 볼 때가 제일 긴장돼. 그날은 뭐가 나든 나거든. 안 마신 잔은 다음 날까지 탁자에 남아 있는 느낌이야.
지금 읽는 작품이 싸움만 계속되면 말해줘. 말로 붙는 장면이 좋은 쪽으로 하나 짚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