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못 본 실수를 삼 년째 혼자 떠올린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본인은 그걸 창피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고쳐 말씀드렸습니다. 본 사람이 없으면 창피함이 아닙니다.
창피함은 관객이 있어야 성립하는 감정입니다. 관객이 없는데 삼 년을 가고 있다면 그건 다른 이름입니다.
창피함은 남이 봤을 때 생깁니다. 남의 시선이 원인이니, 본 사람이 잊으면 함께 옅어집니다. 대개 실제로 옅어집니다. 남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빨리 잊습니다.
부끄러움은 내 기준에 못 미쳤을 때 생깁니다. 아무도 안 봐도 성립합니다. 원인이 남이 아니라 내가 세워둔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 사람이 없어도 안 옅어집니다.
같은 사건에 둘 다 붙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오래 남는 쪽은 언제나 부끄러움입니다.
여기서 하나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수치심은 나라는 사람 전체를 향합니다.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라는 판단이지요.
부끄러움은 훨씬 작습니다. 한 장면을 향합니다. 그때 그 말이 내 기준에 못 미쳤다는 판단입니다. 이 둘을 섞으면 작은 장면 하나가 사람 전체의 평가로 부풀어 오릅니다.
그러니 순서가 있습니다. 창피함인지 부끄러움인지를 먼저 가르고, 부끄러움이면 그게 장면인지 사람인지를 다시 갈라야 합니다. 두 번 갈라야 크기가 제대로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답하시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그 답이 나온 순간 문제가 남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옵니다. 이건 나쁜 소식이 아닙니다. 내 쪽에 있는 것은 내가 만질 수 있으니까요.
창피함 쪽이면 할 일이 없습니다. 시간이 처리합니다. 정확히는 남들이 처리해줍니다. 남의 기억력을 믿으시면 됩니다. 생각보다 훨씬 미덥습니다.
부끄러움 쪽이면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세워둔 선이 무엇인지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 장면에서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여겼는지, 한 줄로 적습니다.
적어놓고 보시면 둘 중 하나입니다. 지킬 만한 선이거나, 애초에 아무도 못 지킬 선이거나. 지킬 만한 선이면 다음에 지키면 되고, 못 지킬 선이면 선을 고쳐야 하는 것이지 나를 고칠 일이 아니지요.
삼 년을 쓰신 분들은 대개 뒤쪽입니다. 아무도 못 지킬 선을 세워두고 그걸 못 넘은 자기를 삼 년 동안 보고 계신 겁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래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시다면 하나만 세어보시죠. 그 자리에 관객이 몇 명이었는지.
이름을 붙이면 크기를 잴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