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를 사 가시는 손님이 신맛이 나는 커피는 별로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날 고르신 봉지가 제일 약하게 볶은 거였어요. 그 전에 사 가신 것도 그랬고요.
봉지에 적힌 말을 못 읽으셔서가 아니라, 그 말이 잔에서 뭘로 바뀌는지를 아직 안 겪어보셔서 그런 거예요. 오늘은 그 얘기를 해드릴게요.
생두는 초록색이고 딱딱해요. 향도 거의 없습니다. 그걸 열을 줘서 부풀리고 색을 내는 게 로스팅이에요.
빵을 굽는다고 생각하시면 편해요. 덜 구우면 밀가루 맛이 남고, 오래 구우면 겉이 진해지면서 고소하고 쌉쌀한 쪽으로 갑니다. 원두도 똑같아요.
그래서 봉지에 적힌 약배전, 중배전, 강배전은 등급이 아니에요. 얼마나 오래 열을 줬는지를 적어둔 것뿐입니다.
덜 볶은 원두는 그 콩이 자란 자리의 성질이 그대로 남아요. 과일 같은 신맛, 꽃 같은 향, 홍차 비슷한 결이 여기서 나옵니다.
대신 몸이 가벼워요. 우유에 넣으면 묻히고, 진하게 내리면 날카로워집니다. 물 온도나 시간이 조금만 어긋나도 티가 확 나고요.
그러니까 커피에서 신맛이 싫으시면 이쪽은 아니에요. 손님이 매번 아쉬워하신 이유가 여기 있었어요.
오래 볶을수록 원래 갖고 있던 신맛과 향은 열에 날아가고, 볶으면서 새로 생긴 맛이 앞으로 나옵니다. 카라멜, 다크초콜릿, 견과류 같은 말로 적히는 게 그거예요.
몸이 두툼해서 우유에 넣어도 안 묻힙니다. 카페에서 라떼에 쓰는 원두가 대체로 이쪽인 이유고요. 조건이 좀 어긋나도 맛이 크게 무너지지 않아서 집에서 쓰기에도 편합니다.
다만 너무 가면 탄맛이 나요. 진한 것과 탄 건 다른 거예요. 이 둘을 구분하는 게 강배전을 고르는 요령입니다.
그래서 처음 사시는 분께는 저도 중간을 권해드려요. 여기서 시작해서 신맛이 아쉬우면 약한 쪽으로, 밍밍하면 강한 쪽으로 옮기시면 됩니다. 한 방향으로 한 칸씩만 움직이는 게 제일 빠른 길이에요.
배전도 한 줄과 볶은 날짜 한 줄. 이 둘이면 충분해요.
가끔 적어놓은 향의 목록을 다 읽고 고르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아주 잘 내렸을 때 나오는 것들이라 집에서 그대로 안 나올 때가 많아요. 실망하기 쉬운 자리예요.
원두는 좋은 걸 고르는 게 아니라 나한테 맞는 쪽을 고르는 거예요. 그 둘은 자주 다릅니다.
그 손님은 중간으로 한 봉지 바꿔 가셨어요. 다음에 오셔서 그러시더라고요. 이제야 집에서 내린 게 가게에서 마신 것 같다고요.
원두를 바꾸신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꾸신 거예요. 커피는 그렇게 한 칸씩 좁혀가는 게 제일 빠르고, 그동안 마시는 잔도 나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