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하나만 하겠다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이 끝날 때쯤에는 거절하면 안 될 분위기가 되어 있었지요.
시작할 때의 이름과 끝날 때의 이름이 달랐습니다. 여기서 갈라야 합니다.
부탁은 거절이 열려 있는 말입니다. 아니라고 해도 관계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받는 쪽이 실제로 고를 수 있습니다.
요구는 거절이 닫혀 있는 말입니다. 아니라고 하면 무언가 상합니다. 관계가 어색해지거나, 나중에 언급되거나, 그 사람 안에서 점수가 깎이지요.
그래서 구별은 말투로 안 됩니다. 아주 공손한 요구도 있고 무뚝뚝한 부탁도 있으니까요. 봐야 할 것은 거절했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느냐입니다.
말은 부탁인데 거절이 닫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 셋 중 하나입니다.
첫째, 사정을 먼저 길게 말합니다. 얼마나 급하고 얼마나 힘든지를 다 듣고 나면 아니라고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둘째, 전에 해준 것을 언급합니다. 장부가 열리는 순간이지요. 그러면 그건 부탁이 아니라 정산입니다.
셋째,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거절하면 그 사람이 곤란해진다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선택지는 사라집니다.
세 가지 다 나쁜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거절이 닫힙니다.
무언가를 부탁받으셨을 때 이렇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아니라고 하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요구라고 해서 안 들어주셔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들어주실 때 그것이 호의인지 대가인지는 아셔야 합니다. 그걸 알아야 나중에 억울하지 않으니까요.
이 자는 제가 부탁할 때도 씁니다. 부탁이라고 하면서 거절을 닫아두지 않았는지 보는 것이지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거절해도 된다는 말을 먼저 붙이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말씀만 해달라고요. 그 한 마디가 있으면 상대가 실제로 고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주 걸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말을 붙이면 거절당할까 봐 안 붙이시는 겁니다. 그런데 안 붙이고 받아낸 승낙은 승낙이 아니라 눌린 것이지요. 그러면 상대 쪽에 장부가 하나 생깁니다.
부탁 쪽이면 할 일은 편하게 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싶으면 하시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시면 됩니다.
요구 쪽이면 할 일은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는지 알아두는 것입니다. 거절이 닫혀 있으면 그건 이미 거래니까요. 거래인 줄 알고 하면 나중에 서운함이 안 남습니다. 부탁인 줄 알고 했다가 나중에 계산서를 받으면 그때 서운해지겠지요.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무언가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한 마디만 붙여보시죠. 어려우면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 말이 이름을 정합니다.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