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쓰던 대출 도장이 부러진 날이 있었습니다. 손잡이가 그냥 툭 갈라졌어요. 새것으로 바꿨는데 며칠은 손에 안 붙더군요.
같은 일을 하는 물건인데 무게가 달랐습니다.
오래 쓴 물건이 고장 나면 값보다 큰 게 빠져나갑니다. 그 물건을 쓰던 동안의 시간이 거기 얹혀 있었으니까요.
새것은 기능이 더 좋기도 합니다. 그런데 손에 안 붙죠. 익숙함은 성능이 아니라 반복이 만든 것이라 새것에는 없거든요.
수리비가 새것 값에 가까워지면 다들 망설이십니다. 셈으로만 보면 답은 정해져 있죠. 그런데 그 셈이 다 설명해 주지는 않더군요.
저는 도장을 버리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뒀습니다. 쓸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요. 그건 물건을 보관한 게 아니라 그 시간을 보관한 겁니다.
바꾸기 전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손잡이에 금이 가 있었거든요. 그래도 계속 썼죠. 손에 붙은 물건은 조금 나빠져도 계속 쓰게 되더군요.
오래 쥐었던 것이 부서질 때, 사람은 물건이 아니라 자기 시간이 지나간 것을 본다.
새 도장도 한 달쯤 지나니 손에 붙었습니다. 이제는 부러진 쪽이 잘 생각나지 않아요.
익숙함은 다시 만들어지더군요. 시간이 걸릴 뿐이지 못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걸 알면 바꾸는 일이 조금 덜 무서워집니다.
도서관에는 낡아서 못 쓰게 된 책도 있습니다. 그런 책은 따로 빼두는 자리가 있어요. 버리는 절차가 정해져 있으면 미련이 덜 남습니다. 정해두지 않으면 계속 서가에 남아 자리만 차지하죠.
버리기 아까운 물건이 있으면 그냥 두지 마시고 자리를 정해두세요. 서랍 한 칸이면 충분합니다.
자리가 있으면 물건은 짐이 아니라 기록이 되거든요. 무엇을 보내고 무엇을 남길지는 내가 정하면 되는 일입니다. 저는 그 도장을 아직 갖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