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손님이 객잔에서 지도를 펴놓고 문파 이름을 하나씩 짚더라고. 화산, 무당, 아미, 소림.
다 있대. 진짜로 있는 산이래. 그러고는 어이없어하더라고. 다 지어낸 줄 알았다는 거야.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어. 근데 이게 우연이 아니야. 일부러 진짜를 쓰는 거거든.
무협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얘기잖아. 사람이 지붕을 뛰어다니고 손바닥으로 바위를 깨.
그걸 독자가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딘가는 붙잡을 데가 있어야 해. 거짓말을 믿게 하려면 진짜를 하나 섞어야 하는 거야.
산 이름이 그 자리야. 화산이 실제로 있는 험한 산이라는 걸 알면, 거기 사는 놈들이 좀 이상해도 그러려니 하게 돼. 땅이 진짜니까 그 위에 선 사람도 반쯤은 진짜가 되는 거지.
이게 더 재밌는 대목인데, 산을 고른 게 아무렇게나가 아니야. 산의 생김새가 그 문파 성격이랑 붙어 있어.
지어낸 산이면 이게 안 돼. 아무 설명도 안 붙거든. 진짜 산을 쓰니까 그 산에 대해 사람들이 이미 아는 게 그 문파 설명을 대신 해주는 거야. 공짜로 얻어 가는 거지.
그렇다고 산을 다 쓰는 것도 아니야. 골라 쓰는 기준이 있어.
이름이 이미 알려진 산이어야 해. 아무도 모르는 산을 쓰면 지어낸 거랑 똑같아지거든. 그리고 사람이 잘 안 사는 데여야 하고. 마을 한복판에 문파가 있으면 강호가 성립을 안 하잖아.
그래서 결국 알려져 있으면서 사람이 안 사는 데로 좁혀져. 그런 데가 몇 군데 안 되니까 작품마다 같은 산이 계속 나오는 거야.
여기서 하나 짚고 갈 게 있어. 산은 진짜를 쓰는데 나라 얘기는 대충 넘어가.
임금이 누군지, 어느 시대인지는 거의 안 밝히잖아. 그러면서 산 이름만 정확해.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계산된 거야.
시대를 못 박으면 역사가 이야기를 잡아먹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지켜야 하니까 마음대로 못 써. 반면에 산은 몇백 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안 늙는 진짜라서 쓰는 거야.
나는 무협을 하나도 모르는 채로 여기 떨어진 놈이라 한동안 이름을 그냥 외웠어.
근데 지도를 한 번 펴보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어. 어느 문파가 어디 있고, 거기서 저기까지 가려면 뭘 넘어야 하는지가 보이니까 이야기가 입체가 되더라고. 왜 저 두 문파가 사이가 나쁜지도 대개 거리로 설명이 돼. 가까우면 부딪히거든.
무협 볼 때 인물 이름이 헷갈리면 자리로 기억하라고 내가 늘 말하잖아. 문파도 똑같아.
이름을 외우려고 하면 안 외워져. 어느 산에 있는지만 알면 나머지는 따라와. 산이 그 문파의 절반쯤은 이미 말해주고 있으니까.
어느 문파가 궁금한지 말해봐. 그 산부터 얘기해줄게. 그거 시작하면 밤새 떠들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