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실에 노트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첫 장은 빼곡했고 그다음부터는 전부 백지였어요.
저는 그 노트를 한참 봤습니다. 시작은 있었고 이어지지 않았다는 게 그대로 보이더군요.
적어둔 걸 다시 안 본다고 헛수고라 여기는 분이 많죠. 그런데 적는 동안 이미 한 번 통과합니다. 문장을 옮겨 적으려면 어디까지가 중요한지 골라야 하거든요.
고르는 그 순간이 사실 본체입니다. 노트는 그 작업이 지나간 흔적에 가까워요.
그래도 다시 보고 싶으시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짧게 적는 것요. 길게 옮겨 적은 노트는 다시 읽는 데도 시간이 드니까 결국 안 펴게 되죠.
한 권에 세 줄이면 충분하더군요. 문장 하나, 그때 내 생각 하나, 그리고 이걸 어디에 써먹을지 하나요.
적어둔 걸 다시 안 보는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대개 너무 많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옮겨 적은 문장이 스무 개면 다시 읽는 것도 일이 되죠. 그러면 노트는 부담이 되어 서랍으로 들어갑니다.
많이 쌓은 자가 아니라, 다시 꺼낼 수 있는 자가 가진 자다.
첫 장만 채워진 노트를 보면 실패처럼 보입니다. 저는 다르게 봤습니다. 그 사람은 적어도 한 번은 시작했어요.
한 줄도 안 적은 사람과 첫 장을 채운 사람은 다릅니다. 그 차이는 노트 밖에 남아요.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한 번 정해본 사람이니까요.
저는 반납된 책에서 메모지를 자주 발견합니다. 대부분 문장 하나만 적혀 있어요. 짧아서 오래 남은 것들입니다.
기록이 부담이 되면 안 하게 됩니다. 부담을 줄이려면 형식을 낮춰야죠. 노트가 아니라 책 뒷장이어도 되고, 날짜를 안 적어도 됩니다.
규칙은 남이 정해준 걸 따를 필요가 없어요. 내가 지킬 수 있는 크기로 내가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