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사정을 두고 두 분이 이야기하는 자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은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고, 다른 한 분은 그 사람이 놓친 자리를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둘 다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아파한 대상이 서로 달랐습니다. 여기서 이름이 갈립니다.
안쓰러움은 상대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것이 보일 때 옵니다.
여기에는 계산이 없습니다. 더 나은 결과가 있었는지, 피할 수 있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저 사람이 지금 무겁게 들고 있다는 사실만 보입니다.
그래서 안쓰러움은 상황이 좋아져도 남습니다. 잘 풀린 사람을 두고도 저 사람 그동안 힘들었지, 하는 마음이 남는 게 그 증거입니다.
안타까움은 다릅니다. 조금만 달랐으면 됐을 텐데 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아까움이 섞여 있습니다. 될 수도 있었던 결과가 머릿속에 하나 서 있고, 실제 결과가 그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는 말에 우리가 유독 크게 반응하는 이유죠.
그래서 안타까움은 결과가 정해지면 끝납니다. 다른 가능성이 닫히면 아까워할 대상이 사라지니까요.
지금 마음이 아프다면 이렇게 물어보시죠. 머릿속에 다른 결말이 하나 서 있습니까?
여기서부터가 실제로 쓰이는 대목입니다.
안타까움을 그대로 말하면 상대에게는 평가로 도착합니다. 조금만 더 하지 그랬냐는 말은 위로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안에는 더 나은 결말이 있었다는 판정이 들어 있습니다. 듣는 사람은 그 판정을 먼저 받습니다.
안쓰러움은 그런 판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방어하지 않아도 됩니다. 힘들었겠다는 말이 아깝다는 말보다 잘 들리는 건 정서의 온도 차이가 아니라 구조의 차이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쓸 때도 갈립니다.
안타까움을 자기에게 계속 쓰면 그건 후회로 굳습니다. 있지도 않은 결말을 계속 세워두고 현재를 그것과 비교하게 되니까요. 비교 대상이 상상이면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일은 자기 연민과 다릅니다. 자기 연민은 억울함을 먹고 자라지만, 안쓰러움은 그동안 들고 있었던 무게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인정은 사람을 주저앉히지 않습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누군가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다면 하나만 확인해보시죠. 그 아픔에 아까움이 섞여 있습니까.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