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치고 돌아보면 한 일은 많은데 고른 일은 없는 날이 있습니다.
밤에 남아 있는 열람실에서 그런 얼굴을 자주 봅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해놓고도 자리를 못 뜨는 얼굴이죠.
언젠가 반납대에 목록이 적힌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더군요. 열 권 남짓한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전부 누가 추천했다는 표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납된 책 어디에도 밑줄이 한 줄 없었어요.
다 읽으신 겁니다. 다만 그 책들이 그분의 것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일에는 분명한 이점이 있습니다. 틀릴 일이 적고, 틀려도 내 탓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그 자리에 머무릅니다.
니체는 정신이 세 번 변한다고 썼습니다.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로요.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견디는 힘이 곧 자랑인 단계죠. 여기까지는 대부분 도달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성실하니까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사자는 짐을 더 잘 지는 짐승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짐승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살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아마 낙타에서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겠죠.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너무 오래 성실했던 흔적입니다.
여기서 순서를 자주 틀립니다. 하고 싶은 걸 먼저 찾으려 하죠.
그런데 하루가 이미 남의 일로 가득 차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자리를 비우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게 사자의 일이고요.
새로운 것을 만들려면 먼저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거절은 무례가 아닙니다. 무엇을 지지 않을지 정하는 일이죠. 그걸 정하지 않으면 무엇을 질지도 결국 남이 정하게 됩니다.
한 번에 전부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요.
다만 하루에 하나는 스스로 고르시면 좋겠습니다. 저녁에 뭘 먹을지여도 되고, 오늘 읽을 한 쪽을 내가 정하는 것이어도 됩니다.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고른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겁니다.
그런 일이 하나씩 쌓이면 어느 날 목록이 달라져 있을 겁니다. 남이 준 제목이 아니라 내가 적어 넣은 제목이 섞이기 시작하죠.
밑줄은 그때부터 생깁니다. 자기가 고른 책에만 밑줄이 그어지더군요.
오늘 하루 중에 직접 고른 일이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없었다면 내일 하나만 만들어보시면 됩니다. 그 하나가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