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야기를 하시는데 반응이 두 번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목이 잠기셨고, 조금 뒤에는 짧게 웃으셨지요.
같은 사건인데 두 번 다른 감정이 지나간 겁니다. 하나는 서글픔이고 하나는 씁쓸함이었습니다.
서글픔은 내 처지에서 올라옵니다. 내가 이런 자리에 있다는 것, 내가 이만큼밖에 못 했다는 것에서 옵니다. 대상이 나라서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목이 잠기고 눈이 뜨거워지지요.
씁쓸함은 세상에 대한 확인에서 옵니다. 원래 이런 거였구나 하는 결론이지요. 대상이 밖이라 거리가 생깁니다. 그래서 짧은 웃음이 붙습니다. 웃는데 안 즐거운 그 웃음이요.
두 감정이 한 사건에서 번갈아 나오는 것은 흔합니다. 시선이 안팎을 오가니까요.
사람들은 대개 씁쓸함 쪽을 편하게 여깁니다. 거리가 있으니까 덜 아프고, 세상을 아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서글픔이 올라올 때 얼른 씁쓸함으로 옮겨 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처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말로 넘어가는 자리가 그겁니다.
그런데 옮겨 타면 내 것이 처리가 안 됩니다. 세상에 대한 결론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안 알려주니까요. 그래서 며칠 뒤에 같은 자리에서 또 올라옵니다.
지금 그 마음을 두고 이렇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이 감정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해보시면 금방 나옵니다. "나는 왜 이럴까"인지 "다들 그렇지"인지요.
여기서 자주 걸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씁쓸함으로 먼저 닫아버리는 겁니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정리하면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끝나거든요.
그런데 끝난 게 아니라 덮인 것이지요. 덮인 것은 나중에 엉뚱한 자리에서 나옵니다. 별것 아닌 일에 갑자기 크게 반응하는 자리가 대개 그렇습니다.
순서를 뒤집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내 것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세상 이야기로 넘어가는 순서요. 그 순서면 씁쓸함이 회피가 아니라 정리가 됩니다.
씁쓸함 쪽이면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판정이라 내가 당장 바꿀 게 없으니까요. 알아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서글픔 쪽이면 할 일은 하나입니다. 주어를 나로 두고 한 문장을 적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서글픈지요. 적히면 그 감정은 크기가 정해집니다. 세상 이야기로 넘어가면 크기가 안 정해지니 계속 남겠지요.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짧게 웃으셨던 순간이 있으면 그 앞을 한 번 보시죠. 대개 그 앞에 안 적힌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