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서 한 시간을 보내시고 아무것도 안 빌린 채 나가신 분이 있었습니다. 나가시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미안할 일이 아닌데도 그러시더군요. 저는 그 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빈손으로 나오면 시간을 버린 것 같죠. 그런데 그 한 시간 동안 실제로는 수십 권을 뽑았다 꽂았다 하셨습니다.
한 권씩 볼 때마다 이건 지금이 아니라는 판단이 있었던 거예요. 판단을 수십 번 한 시간을 낭비라고 하기는 어렵더군요.
무엇이 나한테 맞는지는 대개 안 맞는 것들을 지나가면서 알게 됩니다. 목록을 좁히는 작업이죠.
그래서 저는 빈손으로 나가시는 분께 아쉬워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다음에 오시면 훨씬 빨리 고르시거든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은 날에도, 고르는 눈은 자라 있다.
빈손이 싫어서 아무거나 빌려 가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 책은 대개 안 읽힙니다.
그러면 안 읽은 책이 하나 늘고, 다음에 올 때 그게 부담으로 남죠. 빈손보다 그쪽이 더 손해더군요.
책이 문제가 아니라 그날의 내가 아무것도 받아들일 상태가 아닐 때가 있습니다. 피곤하거나 머리가 복잡하면 어떤 문장도 안 들어옵니다.
그럴 때 서가를 도는 것만으로도 됩니다. 제목들을 지나가는 것도 읽기의 일종이거든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서가를 도는 동안 눈에 걸린 제목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몇 주 뒤에 다른 데서 그 제목을 다시 만나면 손이 가거든요. 그런 식으로 시작된 독서를 저는 여러 번 봤어요.
그분은 다음 주에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10분 만에 두 권을 고르셨어요.
빈손으로 나온 날이 있었으니까 그 10분이 가능했던 겁니다. 무엇을 고를지는 서두른다고 빨라지지 않고, 지나간 시간만큼 정확해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