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뉴스에 나온 사람 이야기를 했습니다. 걱정된다는 말로 시작하셨는데, 다음 문장은 저 사람은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한 문장 만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두 단어를 갈라 적어 두었습니다.
관심은 상대가 열어둔 문으로 들어갑니다. 물어봐 준 것에 답하고, 알려준 만큼 압니다. 그 사람이 어디까지 열었는지를 보고 멈춥니다.
참견은 안 열린 문을 밉니다. 묻지 않은 것에 답을 주고, 안 알려준 것을 추측으로 채웁니다.
말하는 쪽의 마음은 둘 다 좋을 수 있습니다. 걱정도 진심이고요. 그래서 마음으로는 못 가립니다. 갈리는 자리는 요청이 있었느냐입니다.
뉴스에서 특히 자주 넘어갑니다. 화면에 나온 사람은 나에게 문을 열어준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정보는 들어오니 아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면 걱정에서 판정으로 넘어가는 데 한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했어야 했다, 왜 그러지 않았나 하는 문장이지요.
이건 못된 마음이라기보다 구조 때문에 생깁니다. 정보만 있고 관계는 없는 상태에서 사람은 대개 판정 쪽으로 갑니다. 관계가 있으면 조심스러운데, 없으면 조심할 이유가 없거든요.
말을 꺼내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시면 됩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내용이 맞느냐는 이름을 안 바꿉니다. 맞는 참견이 오히려 더 상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반박도 못 하니까요.
여기서 자주 걸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면 문이 늘 열려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문은 관계마다가 아니라 사안마다 열립니다. 십 년을 알아도 이번 일에 대해 안 물었으면 그 문은 안 열린 겁니다. 가까울수록 이 착각이 잘 생기고, 가까울수록 상처도 크지요.
반대쪽 오해도 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면 무심한 사람이 될까 봐 뭐라도 얹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것도 관심입니다. 말이 없다고 관심이 없는 게 아니겠지요.
관심 쪽이면 할 일은 답하는 것입니다. 물어본 만큼만요.
참견 쪽이면 할 일은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말 대신 질문 하나를 먼저 두시면 됩니다.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묻는 것이지요. 그러면 상대가 열지 말지를 정할 수 있습니다. 열면 그때부터 하는 말은 관심이 되고, 안 열면 그 말은 안 하시는 게 맞습니다.
화면 속 사람에 대해서는 애초에 물어볼 수가 없으니, 그 자리에서는 판정을 접어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누군가에 대해 하실 말이 있으면 한 번만 확인하시죠. 그 사람이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