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같은 일을 세 번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에는 그래도 좀 그렇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에는 알면서 그런 거라고 했습니다.
일은 하나도 안 바뀌었습니다. 바뀐 것은 상대에게 붙인 혐의뿐입니다. 그 사이에서 이름이 갈립니다.
섭섭함은 기대한 것이 안 왔을 때 옵니다.
챙겨주겠거니 했는데 안 챙겨졌고, 먼저 연락하겠거니 했는데 안 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가 그 기대를 알고 있었는지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섭섭함에는 여지가 있습니다. 바빴겠지, 몰랐겠지, 하는 문장이 아직 살아 있죠. 여지가 있으니 말을 걸 수도 있습니다.
야속함은 다릅니다. 상대가 내 사정을 알고 있었다고 전제할 때 나옵니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뻔히 보였을 텐데 그랬다는 것이 야속함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야속함은 섭섭함보다 무겁습니다. 무지가 아니라 선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감정은 사람을 향합니다. 섭섭함은 일에 붙지만 야속함은 사람에게 붙습니다.
지금 마음이 상하셨다면 이렇게 물어보시죠. 상대가 내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여기서부터가 실제로 쓰이는 대목입니다.
섭섭함은 말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몰랐을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알려주는 형식이 성립하죠. 그때는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나는 이런 걸 기대하고 있었다고요. 이건 비난이 아니라 정보 전달입니다.
야속함은 그게 안 됩니다. 이미 알고도 그랬다고 보고 있으니, 입에서 나오는 순간 추궁이 됩니다. 상대는 방어부터 하게 되고, 대화는 사실 확인 싸움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섭섭할 때 말해야 합니다. 야속함으로 굳고 나서 말하면 늦습니다.
앞서 본 그 사람처럼, 말하지 않고 여러 번 되뇌면 섭섭함은 거의 야속함으로 갑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되뇔 때마다 우리는 이야기를 조금씩 더 그럴듯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대개 상대가 알고도 그랬다는 쪽이겠지요. 그 설명이 내 아픔의 크기와 제일 잘 맞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되뇜은 확인이 아닙니다. 되뇔수록 혐의는 무거워지고, 검증은 한 번도 안 일어납니다.
이미 야속함으로 굳었다면 상대에게 따지는 것보다 먼저 하실 게 있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그 전제를 한 번 확인해보시는 겁니다.
말해준 적이 있습니까. 표정으로만 보였습니까. 그때 상대가 그걸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을까요. 이 셋을 짚어보면 전제가 생각보다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전제가 무너지면 야속함은 섭섭함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섭섭함은 말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마음이 상하셨다면 하나만 확인해보시죠. 그 사람이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정말 있습니까.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