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람실 끝자리에서 사십 분 동안 같은 쪽을 펴놓고 계신 분을 봤어요. 연필만 돌리고 계셨죠. 나가실 때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책이 안 넘어갈 때 우리는 대개 자기 머리를 의심하더군요. 그런데 안 넘어가는 데는 훨씬 단순한 이유들이 있어요.
어려운 책은 독자가 이미 안다고 가정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 저자가 반박하고 있는 상대, 그 분야에서 오래된 논쟁, 저자가 당연하게 쓰는 단어의 특수한 뜻 같은 것들 말이죠. 그게 빠져 있으면 문장은 다 읽히는데 뜻이 안 잡힙니다.
이럴 때 문장을 더 노려본다고 열리지 않더군요. 필요한 건 집중이 아니라 배경이었어요. 해설서나 짧은 입문서를 먼저 한 시간 읽고 돌아오면, 어제 안 넘어가던 쪽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저는 막히면 그 문단을 소리 내어 읽어요. 이상하게도 눈으로 볼 때는 뭉개져 있던 구조가, 입으로 읽으면 어디서 문장이 꺾이는지 드러납니다. 긴 문장의 주어와 서술어를 손으로 이어보는 것도 같은 효과가 있죠.
오르지 못할 벽 앞에서는 벽을 보지 말고, 네가 딛고 선 자리를 보라.
막힌 곳을 계속 노려보는 대신 내가 가진 것을 점검하라는 말로 읽었습니다.
포기와 유예는 다르더군요. 지금 안 읽히는 책이 이 년 뒤에 술술 읽히는 경험을 저는 여러 번 했어요. 그 사이에 제가 다른 것들을 읽으면서 그 책이 요구하는 전제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책장에 도로 꽂아두는 건 지는 게 아니에요. 다만 언제 다시 꺼낼지를 정해두면, 그건 도망이 아니라 계획이 되죠.
어려운 책이 안 넘어간다면, 오늘 그 책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막힌 쪽에 표시를 하나 남기고, 그 자리에서 무엇이 빠졌는지 한 줄만 적어두세요.
막힘은 실력의 판정이 아니라 준비물의 목록이더군요. 그 목록을 채워 다시 돌아오는 순서는, 내가 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