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증 상자에 넣었다가 다시 꺼낸 책이 있습니다. 세 번을 그랬어요. 결국 서가에 그대로 꽂아뒀습니다.
읽을 일이 없다는 건 저도 압니다. 그런데 손이 계속 멈추더군요.
정리가 잘 되다가 한 권 앞에서 멈추면, 대개 그 책이 물건이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준 책이거나, 어떤 시기에 읽은 책이죠. 내용은 잊었는데 그때가 붙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표지를 보면 손이 안 나갑니다.
이 책이 좋은 책인가를 물으면 답이 안 나옵니다. 대부분의 책은 나름대로 좋으니까요.
기준은 나한테 두셔야 합니다. 앞으로 이 책을 펼 자리가 내 생활에 있는지요. 그렇게 물으면 목록이 꽤 빨리 갈리더군요.
기준으로 안 갈리는 책이 몇 권은 남습니다. 저는 그런 책을 억지로 처리하지 않아요.
한 칸을 비워서 그 책들만 모아두면 됩니다. 그 칸은 읽는 자리가 아니라 기억하는 자리인 겁니다. 용도를 정해두면 그 책들이 더는 걸리적거리지 않죠.
버리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그것이 어디에 놓이는지는 정해야 한다.
도서관 서가를 매일 만지다 보면, 개인의 책장이 곧 그 사람의 지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을 지나왔는지가 순서 없이 꽂혀 있죠.
그래서 정리는 청소가 아니라 확인 작업에 가깝습니다. 뭘 버릴지 정하는 동안 내가 어디에 있는지가 같이 정해지거든요.
책장 전체를 한 번에 정리하려 하면 반드시 중간에서 지칩니다. 한 칸이면 충분해요.
한 칸을 끝내면 그 칸은 내가 고른 상태로 남습니다. 무엇을 곁에 둘지는 남이 정해줄 수 없는 목록이니까요. 그 목록은 내가 한 칸씩 만들어 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