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쓰던 머그잔을 깨뜨리고 다음 날 새 잔으로 마셨는데 손이 계속 어색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잔 하나에 이러는 게 우습다고도 하셨지요.
우습지 않습니다. 다만 그건 쓸쓸함이 아니라 허전함입니다.
쓸쓸함은 곁에 사람이 없을 때 옵니다. 대상이 사람이라 사람으로 채워집니다. 누가 옆에 있으면 대체로 가라앉지요.
허전함은 있던 것이 빠진 자리에서 옵니다.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이나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전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없던 것은 허전하지 않습니다. 있다가 없어진 것만 허전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득한 자리에서도 허전할 수 있습니다. 빠진 자리가 그대로 있으니까요.
이게 가장 확실한 구별점입니다. 쓸쓸함에는 이전이 필요 없습니다. 혼자 있는 지금만으로 성립합니다.
허전함에는 이전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매일 통화하던 시간, 늘 앉던 자리, 손에 익은 무게 같은 것들이지요.
그래서 허전함은 아무 때나 오지 않고 그 시간대에 옵니다. 통화하던 시간이 되면 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니라 자리에 붙은 감정이라 그렇습니다.
지금 그 마음을 두고 이렇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지금 누가 옆에 있으면 나아질 것 같습니까?
두 번째면 사람을 부르는 것으로는 안 풀립니다. 잘못 부른 이름으로 사람을 부르면 옆에 사람을 두고도 안 채워져서 더 이상해지지요.
빈 자리가 불편해서 아무거나 밀어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 물건을 사거나, 안 맞는 사람을 서둘러 곁에 두거나, 시간을 일정으로 꽉 채우는 식이지요.
그러면 자리는 안 보이는데 감각은 남습니다. 왜 허전한지 모르는 채로 허전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름을 붙일 기회를 덮어버린 셈이니까요.
여기서 자주 걸리는 자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물건이나 습관이 빠진 허전함을 사람 문제로 오해하는 겁니다. 잔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데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결론까지 가시는 거지요. 사실 그 결론은 근거가 없습니다.
쓸쓸함 쪽이면 할 일은 사람 쪽입니다. 대단한 만남이 아니어도 됩니다. 짧은 통화 한 번으로도 눈금이 내려갑니다.
허전함 쪽이면 할 일은 빠진 것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것입니다. "잔이 없어졌다"가 아니라 "십 년 동안 아침마다 잡던 무게가 없어졌다"까지요. 거기까지 적히면 허전함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크기가 정해집니다. 크기가 정해진 감정은 사람을 흔들지 못합니다.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이유 없이 허전하셨다면 그 시간대를 적어두시죠. 그 시간에 무엇이 있었는지가 답일 겁니다.
이름을 붙이면 크기를 잴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