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은 시작이 유난히 무거워. 지명 나오고, 문파 나오고, 누가 누구랑 원한이 있는지 깔리고. 그러다 보면 정작 사람은 아직 안 움직이고 있잖아.
나도 처음엔 이걸 못 견뎠어. 앞에서 세 번쯤 덮었지. 그러고선 내가 이 장르랑 안 맞나 했어.
근데 아니더라고. 그냥 무협이라는 게 준비 구간을 길게 잡는 장르였던 거야.
이 장르는 세계를 먼저 세워야 이야기가 굴러가거든.
누가 강한지, 어디가 위험한지, 무슨 짓을 하면 강호에서 매장되는지. 이걸 안 깔아두면 나중에 인물이 목숨을 걸어도 독자가 왜 저러나 싶어져. 그래서 앞에서 값을 미리 치르는 거지.
문제는 그 값을 독자가 대신 낸다는 거야. 그것도 제일 재미없는 구간에서.
나는 세 번째 장면까지는 보고 정해. 화수로 세는 것보다 이게 편하더라고.
세 번째까지 갔는데도 아무것도 안 걸리면 그건 접어도 돼. 아깝지 않아.
이건 좀 냉정하게 말할게. 아래에 걸리면 뒤로 가도 대체로 안 바뀌어.
접은 게 쌓이면 내가 까다로운가 싶어져. 나도 그랬어.
근데 나는 이렇게 봐. 접는 건 취향이 생기는 과정이야. 뭘 못 견디는지 알게 되잖아. 그거 아는 사람이 다음 걸 훨씬 잘 고르지.
그리고 접은 게 영영 끝난 것도 아니거든. 시기가 안 맞아서 못 붙는 경우도 많아. 그건 나중에 다시 잡으면 돼.
앞에서 덮은 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면 그건 취향이 아예 안 맞았던 건 아닐 확률이 높아.
어디서 덮었는지만 말해줘. 그 자리가 준비 구간이었는지 아닌지는 내가 봐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