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보낸 긴 글을 열어보지도 않고 지웠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본인은 그걸 아직 의심하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고쳐 말씀드렸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읽습니다. 읽어야 확인이 되니까요.
안 읽고 지웠다면 그건 의심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다음 단계가 완전히 다릅니다.
의심은 아직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확신이 없어서 확인하려 합니다. 증거를 찾고 있고, 증거가 나오면 판단이 바뀝니다. 괴롭지만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불신은 이미 닫힌 상태입니다. 판단이 끝났고 확인을 그만두었습니다. 증거가 나와도 안 봅니다. 보더라도 그걸로 판단을 안 바꿉니다. 조용하지만 멈춘 상태입니다.
그러니 세기의 차이가 아닙니다. 아주 심한 의심도 열려 있고, 조용한 불신도 닫혀 있습니다. 문이 어느 쪽인지가 전부입니다.
여기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닫는 쪽이 훨씬 편합니다.
의심은 계속 흔들립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니 마음이 자꾸 왔다 갔다 합니다. 반면 닫아버리면 흔들림이 멈춥니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고 정해놓으면 더 이상 재볼 일이 없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의심을 오래 못 버티고 불신으로 넘어갑니다. 결론을 낸 게 아니라 흔들림을 못 견뎌서 닫는 겁니다. 저는 그 순간을 정확히 부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그 사람이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면 판단을 바꾸시겠습니까?
여기서 "증거를 봐야 알겠다"는 답이 나오시면 아직 앞쪽입니다. 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증거를 상상해봐도 마음이 안 움직이면 뒤쪽입니다.
불신을 의심으로 부르면 자기가 아직 공정한 줄 압니다. 이미 닫아놓고 아직 보는 중이라고 적어두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는 계속 해명하게 되고, 아무리 해도 안 통하니 결국 지칩니다. 어느 쪽에도 좋을 게 없겠지요.
의심을 불신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직 흔들리고 있으면서 이미 끝났다고 적는 겁니다. 그러면 확인할 기회를 스스로 닫아버립니다.
의심 쪽이면 할 일은 확인할 항목을 하나로 좁히는 것입니다. 전부를 확인하려 들면 끝이 없습니다. 무엇 하나가 확인되면 마음이 놓이겠는지, 그것만 정하시면 됩니다.
불신 쪽이면 할 일은 닫혔다는 사실을 나에게 정확히 적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통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관계에서 내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이기 때문입니다.
닫은 것을 닫았다고 적어두면 최소한 하나가 정리됩니다. 상대의 해명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게 됩니다. 안 볼 증거를 기다리는 건 양쪽 모두에게 시간만 쓰는 일이니까요.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마음이 안 놓이는 사람이 있으시다면 하나만 물어보시죠. 증거가 나오면 바꾸시겠습니까.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