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하나를 들고 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맨 위에 얹힌 책 속표지에 다른 사람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선물 받은 책이었을 겁니다. 그분은 그 장을 펴보지도 않고 상자째 밀어놓고 가셨죠.
기증 문의를 받으면 저는 먼저 몇 권인지를 묻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두고 계셨는지를 묻죠.
대답이 길어지는 분이 많습니다. 삼 년쯤 됐다거나, 이사를 두 번 했는데 계속 따라왔다거나요. 그 말 안에는 책을 처분하겠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읽겠다고 했던 자기 자신을 정리하는 일에 가깝더군요. 책은 그 약속의 물증이라 눈에 걸리는 겁니다.
여기서 실망하시는 분이 계셔서 미리 적어둡니다.
야박하게 들리겠죠. 그런데 서가는 넣는 자리가 아니라 덜어내는 자리입니다. 한 권을 올리면 한 권을 내려야 하니까요. 받는 쪽에도 자리의 사정이 있습니다.
가벼워지는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습니다. 갈리는 지점이 하나 있더군요.
펴보고 넘긴 분은 가벼워집니다. 목차만이라도 한 번 넘겨보고, 아 이건 지금의 내가 안 읽겠구나 하고 확인한 뒤에 넘기는 경우죠.
안 펴보고 넘긴 분은 다시 사십니다. 몇 달 뒤에 같은 책을 대출하러 오시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확인을 안 했으니 약속이 아직 안 끝난 겁니다.
버린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름을 바꾸고 돌아온다.
앞서 말씀드린 그 상자에서 저는 속표지 이름을 한참 봤습니다.
받은 책은 넘기기가 유독 어렵습니다. 책이 아니라 준 사람이 걸리니까요. 안 읽었다는 사실이 그 사람에 대한 답장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 사람이 준 것은 책이 아니라 읽으라는 권유였다고요. 권유는 지켜야 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원래 권유죠.
전부 넘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세 권만 남기시라고 말씀드립니다.
한 권은 이미 읽고 좋았던 책, 한 권은 지금 읽고 있는 책, 한 권은 정말로 언젠가 읽을 책이요. 세 번째 자리를 하나로 정해두면 그 뒤부터는 쌓이지 않더군요.
자리가 하나뿐이면 새 책이 들어올 때마다 선택을 해야 하니까요. 쌓이는 건 책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리가 무제한이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기증대에 상자를 놓고 가시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저한테 미안할 일이 아닌데도요.
안 읽은 책이 쌓였다는 건 그때마다 뭔가를 알고 싶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이 없었으면 애초에 사지도 않으셨겠죠. 다 읽지 못한 건 시간이 없었던 것이지 게으른 게 아닙니다.
그러니 넘기실 때 정리하는 마음으로만 넘기세요. 반성하는 마음은 안 넣으셔도 됩니다. 그 상자는 실패한 기록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고 싶었던 밤들이 남긴 자국입니다. 저는 그런 상자를 여러 번 받아봤고, 받을 때마다 그 사람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