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뉴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화면의 자막은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적고 있었고, 옆에서 보던 이웃은 저 사람이 원래 그렇다고 했습니다.
같은 사안인데 겨누는 곳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두 단어를 갈라 적어 두었습니다.
비판은 행동을 겨눕니다. 무엇을 했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가 들어 있습니다. 대상이 행동이라 고칠 여지가 남습니다.
비난은 사람을 겨눕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판정이 들어 있습니다. 대상이 사람이라 고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은 고쳐지는 물건이 아니니까요.
말의 세기로는 안 갈립니다. 아주 조용한 비난도 있고 아주 날카로운 비판도 있지요.
가장 간단한 확인법이 있습니다. 문장에서 사람 이름을 빼는 것입니다.
비판은 이름을 빼도 남습니다. 어떤 절차가 빠졌고 어떤 기준을 안 지켰는지가 그대로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해도 같은 문장이 됩니다.
비난은 이름을 빼면 아무것도 안 남습니다. 남는 게 없다면 그 문장이 담고 있던 것은 사안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다는 뜻이지요.
비난이 더 빨리 퍼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비판은 알아야 할 수 있고 비난은 몰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절차나 기준을 모르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못 씁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판정은 아무 정보 없이도 됩니다. 그래서 사안이 복잡할수록 사람 쪽으로 문장이 몰립니다.
여기서 자주 걸리는 자리가 있습니다. 비난이 많이 붙은 사안을 보고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고 읽는 겁니다. 그런데 비난의 양은 사안의 크기가 아니라 사안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려줄 때가 많습니다.
이 자는 남을 볼 때만 쓰는 게 아닙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화가 났을 때도 같은 자로 잽니다.
말하려는 문장에서 상대 이름을 빼봅니다. 남는 게 있으면 그건 말해도 되는 문장입니다. 안 남으면 그건 전달이 아니라 판정이지요. 판정은 상대가 받아도 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그 자리에서 멈춥니다.
저도 후자 쪽으로 자주 기웁니다. 사람을 겨누는 문장이 더 시원하거든요. 다만 시원한 것과 전달되는 것은 다릅니다.
비판이면 확인할 게 있습니다. 항목이 있으니 맞는지 따져보면 됩니다.
비난이면 따질 게 없습니다. 그때 할 일은 그 문장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사람 자리에 행동을 넣어보는 것이지요. 넣었더니 문장이 안 만들어지면, 그건 사안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감정도 이름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비판은 아니겠지요.
잠을 못 주무시거나, 일상이 무너지고 있거나, 몸에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저 말고 전문가를 찾으셔야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일과 치료하는 일은 다릅니다.
저는 이름까지만 붙입니다.
오늘 읽은 문장 중 하나를 골라 이름을 빼보시죠. 남는 게 있습니까. 그 한 번이 두 단어를 가릅니다.
구분하면 할 일이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