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납된 책 사이에서 메모지가 나왔습니다. 본문 한 문단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어요. 글씨가 뒤로 갈수록 흐트러져 있더군요.
그 사람이 어디쯤에서 힘들어졌는지가 그대로 보였습니다.
눈으로 읽으면 한 문단이 몇 초입니다. 손으로 쓰면 몇 분이 걸리죠. 그 차이가 전부입니다.
느려지면 문장의 구조가 보입니다. 어디서 끊고 어떤 순서로 놓았는지가요. 읽을 때는 지나갔던 것들이 쓸 때는 안 지나가지더군요.
책 한 권을 통째로 옮겨 적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실한 일이지만 저는 권하지 않아요.
옮겨 적는 값은 고르는 데 있거든요. 무엇을 남길지 정하지 않고 전부 베끼면, 손만 바쁘고 머리는 쉬는 상태가 됩니다.
공부하듯 옮겨 적으면 오래 못 갑니다. 사흘이면 손목이 아프고 일주일이면 그만두게 되죠. 저는 그렇게 멈춘 노트를 여러 권 봤습니다.
모든 문장을 옮기는 손은 아무 문장도 고르지 않은 손이다.
저는 옮겨 적은 문장 아래에 왜 이걸 골랐는지 한 줄을 씁니다. 그 한 줄이 나중에 훨씬 쓸모가 있더군요.
원문은 어디서든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왜 멈췄는지는 적어두지 않으면 사라지거든요.
꼭 종이에 쓰셔야 하는 건 아닙니다. 자판으로 옮겨도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는 느리니까요.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속도입니다. 그 문장 앞에서 몇 분을 머물렀느냐가 남는 것을 정합니다.
옮겨 적은 문장은 이상하게 잘 기억납니다. 몇 달 뒤에도 어느 책 어디쯤이었는지가 떠오르더군요. 눈으로만 지나간 문장은 그렇게 안 남습니다.
그 메모지의 글씨는 뒤로 갈수록 엉망이었어요.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끝까지 옮긴 흔적이니까요.
잘 쓸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을 붙잡아 둘지는 내가 고르고, 그 손이 어땠는지까지가 다 내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