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열면 초반에 거의 다 나와. 주인공이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
처음엔 그냥 클리셰인 줄 알았어. 다들 산에서 배우고 다들 산에서 내려오잖아.
근데 이 장면이 하는 일이 따로 있더라고. 산 위랑 산 아래는 규칙이 완전히 다른 데거든. 그 경계를 넘는 장면이라서 계속 쓰이는 거야.
그러니까 하산은 무공을 다 배웠다는 졸업장이 아니야. 혼자 판단해본 적이 없는 놈을 판단만 남은 데다 던지는 일이지.
하산하자마자 사기당하고, 값을 바가지 쓰고, 엉뚱한 놈을 믿어. 이게 답답해서 접는 사람이 많더라.
근데 그게 작가가 인물을 바보로 만든 게 아니야. 산에서는 그런 걸 배울 일이 없었거든. 검을 아무리 잘 써도 은자 시세는 모르는 거야.
객잔에 처음 들어온 티가 나는 젊은 놈을 본 적 있어. 값을 안 묻고 시키더라고. 계산할 때 얼굴이 굳더라. 무공하고 아무 상관 없는 데서 처음 진 거지.
그리고 여기서 그놈이 어떤 놈인지가 처음 드러나.
작가가 하산 직후 한 챕터를 어떻게 쓰는지 보면 이 이야기가 성장물인지 무쌍물인지가 바로 갈려. 이게 은근히 정확한 잣대야.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아끼던 제자를 왜 혼자 보내냐고.
그건 사부가 따라가면 이야기가 안 굴러가서야. 판단을 대신 해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그놈은 영영 자기 판단을 안 하거든. 그래서 무협에서 사부는 대개 산에 남거나, 죽거나, 사라져.
이거 좀 잔인한데 이 장르가 계속 하는 말이 그거야. 누가 대신 정해주는 동안은 안 큰다.
하산 구간이 답답하면 이렇게 봐. 지금 이건 지는 장면이 아니라 값을 배우는 장면이야.
여기서 뭘 잃었는지가 나중에 다 돌아와. 돈을 잃었으면 돈을 아는 놈이 되고, 사람한테 속았으면 사람을 보는 놈이 돼. 그 대가를 안 치른 주인공은 나중에 판이 커졌을 때 반드시 무너지더라.
나도 예전에 이 구간에서 몇 번 접었어. 지금은 여기가 제일 재밌어. 다음에 하산 장면 나오면 그놈이 처음 뭘 잃는지 한번 봐봐.